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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처 교수를 닮은 지휘자

by have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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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위플래쉬〉가 나왔을 때, 몸담고 있는 오케스트라에서는 ‘플레처 교수’ 같은 사람이 딱 우리 주변에 있지 않느냐고 농담했다. 까칠하고 엄한 지휘자. 거짓말 아니고 정말 그런 사람이 있냐고? 사실이다. 바로 우리 지휘자 선생님이니까.


똑 닮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고 정확히 말하자면 닮은 부분이 ‘있다.’ 음악에 엄격하다. 박자가 빠른지 느린지 묻는 그 명장면 느낌이 좀 닮았다. 대체 왜 64분의 1 박자를 맞추지 못하는 이유가 뭔가 이해가 가지 않으실 거다. 한 사람이 틀리면 음악 전체가 흐트러진다. 답답한 마음에 부러지고 날아간 지휘봉 정도는 기억한다. 걱정 마시라. 지휘봉은 아무도 맞지 않았고, 새 지휘봉이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등장했다.


플레처 교수와 명백히 다른 점은 폭력성에서 갈린다. 플레처 교수는 ‘고의적으로’ 인격을 모독하고 상대를 이간질시키는 폭력적인 사람이다. 상대를 교묘하게 자신이 원하는 상황에 빠뜨려 놓고 다 ‘네가 잘되라고’ 혹은 ‘네가 부족해서’라고 믿게 만든다. 그야말로 철옹성 같은 개미지옥이다. 사람을 상처주고, 죽고, 미치게 할 만큼.


아무리 역사에 길이 남을 ‘천재’를 만들고 싶어도 그렇지 교수가 저지르는 행동은 변호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냥 잘했어’ 정도로만 만족하지 않는 자세는 좋지만, 고통과 분노로 갈아 만든 실력이 어디 오래 가겠냐 말이다. 만약 우리 지휘자 선생님이 그 교수 같았다면 나는 데이미언 셔젤 감독처럼 영화를 만들어서 엄청난 작품으로 데뷔했을 거다. 아니 그보다 먼저, 현실적으로 일단 어디다 신고하고 몸을 숨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지휘자 선생님은 악명높은 플레처 교수와 비교되었는가. 그건 사람들의 두려움과 그들이 받은 상처 때문이었다.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토끼처럼 빨개진 눈망울, 술을 털어 넣다가 잠드는 이들, 혹은 아예 자취를 감추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순간에는 그렇게 매정해졌어야 한다. 사람에 흔들리면 힘들어진다. 좋게 좋게 넘어가서는 나아갈 수 없다. 함께 좋은 음악을 만들어가야 하면서도 그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을 챙겨야 한다. 두 가지는 충돌하곤 한다. 음악이 모양새를 갖춰간다. 이게 지휘자의 역할이구나 싶다. 군데군데 물이 새는 곳을 일일이 확인하며 진땀 흘리고 마시는 물 한 잔처럼. 시원하다.


선생님과 정반대의 나긋한 다른 지휘자선생님을 본 적 있었다. 사람들은 들었으나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모두들 그를 보지 않고 다른 곳에 파묻혀 있었다. 그 자리가 몹시 외로워 보였다. 지휘자는 모두의 앞에 있지만 반대로 사람들이 떠나면 갈 곳을 잃는다. 우스갯소리로 ‘만년 비정규직’이라시던 말이 생각난다.


상처는 생각이 필요하다. 사람 마음이 요상하다. 내가 틀려서 지적받는 것인데 듣다 보니 선생님이 나를 미워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게 오해가 생긴다. 일주일이나 되는 긴 합숙에서 친해지기는커녕 선생님과 벽이 견고해진다. 합주 때 지적을 받는다. 한참 연배가 많으신 어른이고 식사하거나 술 마실 때에도 말을 섞을 일도 많지 않다. 아침이 밝고 합주를 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맥 빠지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고생을 하는 걸까. 칭찬받는 것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급이고 틀리는 일은 눈 돌리면 보이는 모래알처럼 많다. 두려움과 서운함, 야속함이 뒤섞여 상처를 받는다.


연주회에 서기 위해 처음 합숙에 간 나도 다르지 않았다. 자꾸 틀리는게 바보 같아 자책하면서 속을 끓였고 혼날까 안절부절했다. 선생님과 저녁에 술 한잔할 기회가 왔다. 그때 처음 제대로 선생님을 보았다. 지휘자가 아닌 선생님을 보는 순간. 멋있었다. 낮은 목소리, 카리스마. 쏘맥을 눈대중으로 정확하게 비율을 맞추시는 걸 보고 감탄했다. 나는 잔으로 계량해야 하는데. 내공이 장난 아니다.


남몰래 호감을 쌓다가 선생님께 들은 말이 “너는 악기 오래 안 하게 생겼다”였다. 발끈했는지 7년을 함께 한 원동력이 되었다. 왕이 될 상은 정해져 있어도 악기 오래 하지 않을 상이 정해져 있단 말인가.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기도 했다. 2, 3년을 주기로 자주 큰 고비에 빠지긴 했으니까.


지휘자 선생님을 플레처 교수와 같은 ‘이미지’가 된 이유는 아무도 먼저 다가가려 하지 않았고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주자들은 선생님과 가까워질 기회를 찾지 않았고 선생님은 우리에게 오해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음악을 위해서 날카롭게 지적을 하는 데 비해 사석에서 감정을 어루만지는 일에는 인색한 편이었다. 당근은 생략되었고 채찍은 당연했다. 시험이었을지도 모른다. 슬렁슬렁 연주회에 서보는 ‘경험’을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서지 말라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오래 안 하게 생겼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증명하고 싶었다. 한 악기,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한 번 칭찬을 들으면 진짜인가 싶으면서도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더 오래 하게 된 건 선생님에 대한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처음엔 무섭기만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어머니와 많이 닮았다. 태어나신 해도 같고 성격도 비슷하다. 다가가기 어려워 보여도 속은 따뜻한, 내가 존경하는 이 시대의 츤데레. 부모님 같다고 생각하고 나니 새롭게 보이는 면이 있었다. 선생님에겐 플레처 교수 같은 분노보다는 잘 표현하지 못하는 서투른 애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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