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찾아오는 사람들
윤리와 사상부터 철학까지. 에이, 벌써부터 지루해하진 마시고. 왜 옛날 사람들이 ‘인간의 본성’에 관한 수많은 논의를 했을까? 궁금하지 않나? 인간이 날 때부터 착하든 나쁘든, 도화지 같았든 그게 왜 궁금한 것인가.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랬는데 원인을 안다고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만약 어느 날 정말 나쁜 사람을 만나서 그런 거라면? 옛날 사람들도 궁금했던 건 아닐까.
내 주변에서, 혹은 들리는 말에 어떤 사람이 상상도 못 할 짓을 저지른다. 여태까지와 다르다. 설명할 수 없는 예외적인 사람이 나타났다. 사소한 질문을 업그레이드하면 제법 고상해진다. ‘그 사람 왜 그랬을까?’가 ‘그 사람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로, 마지막에는 일반화.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로 말이다. 어디까지나 내 궤변 같은 가설이다.
여태껏 운이 좋았거나 잊고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상처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다 나쁜 사람을 만났다. 가장 속상했던 건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알 만한 사람이 내게는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나.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모두에게 나쁜 사람이 아니다. 내게만 나쁜 사람이지. 내게만 상처를 주는 사람.
누군가의 귀한 딸과 아들, 어머니와 아버지, 할머니와 할아버지인 평범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안다. 그들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많은 사람이 분명히 그들을 좋아하고 아끼고 사랑할 것이다. 나도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으로 흐뭇하게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상처를 준 이유도 안다. 결국은 자기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남보다 자기가 먼저인 것도 안다. 내가 상처받은 이유도 안다. 내게 그들이 필요할 때 그들이 나를 돌아보지 않았을 뿐이다.
어른의 특혜일까? 상처의 폭이 넓고 깊어진다. 보통 사람이라고 상처도 보통으로 주는 건 아니다.
헤어지고 아는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다니고 내 친구와 만나다 마주친 사람. 내가 본인을 더 좋아했다고 혹은 내가 여지를 주었다거나 내가 틈을 주지 않는다는 온갖 이유로 자기가 상처받기 싫어 내 탓을 하던 사람, 나를 포함해 수많은 얼굴과 몸매를 평가하고 음담패설을 즐겨 하던 사람,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뒤늦게 전해 듣게 하는 사람, 잘 알지도 못하면서 판단하고 뒷담화를 하는 사람, 자신을 대우해 주지 않는다고 나이나 힘을 운운하며 인신공격을 하던 사람.
쓰고 보니 많다. 그들의 즐거운 디딤돌쯤 되는 걸까, 나는. 저를 밟고 올라서세요. 행복한 세상이 펼쳐질 거랍니다.
그때는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었다. 내가 미웠을까, 상황이 그랬을까,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까?
화가 났다. 헛똑똑이고, 멍청이였다. 사람을 볼 줄 모르는구나. 이렇게 무방비하게 당해 버리는구나. 더 철저했어야 했다. 의아했다. 내 마음 상처가 제일 아프다고 그들을 나쁘다고 할 수 있나. 멈칫했다. 그들은 누구를 죽인 것도 아니고 범죄자도 아니다. 겉으로는 내게 아무런 손해를 주지 않았다. 나만 속으로 아팠을 뿐이다.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가.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아픔을 주지 않았을 거라고 자부할 수 있나. 환장하겠다. 왜 나는 그들을 원망만 할 수가 없는 건가. 왜 이런 생각이 나를 방해하는 건가.
내가 너무 예민한가 싶었다.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건 아닐까. 유난인 건가 싶게 세상은 조용했다. 여전히 기억하고 싶지는 않지만 기억이 잘 난다. 그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 곁을 서둘러 떠났다. 말을 하긴 했다. 그렇다고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을 속시원하게 풀지는 못했다.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 않았다. 내가 그랬나? 전혀 몰랐어. 기분 상했다면 미안. 기억하지 못하거나 깊이 없고 진심 아닌 사과를 받을 때는 비참했다. 나만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그래서 떠났다. 시간이 아까웠다. 머릿속에 그들을 떠올리는 에너지조차 아까웠다. 결정적으로는 나만 떠나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과 하하 호호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 혼자 잘못된 곳에 있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피해의식일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 그 편처럼 느껴졌다.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공기마저 가팔랐다. 언제든 무너지기 좋은 날이었다. 무너지기 싫어서 안간힘을 썼다. 머릿속에서 온갖 목소리가 돌아다녔다. 그게 다 내 목소리였고, 시끌벅적한 소리에 머리가 복잡했다.
A-“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걸.”
B-“사람이 싫어졌어. 다신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이번 생은 글렀어. 한두 번이 아니고. 자괴감 든다.”
C-“바보 같은 소리.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아. 지금이라도 알았잖아. 넘어가. 좋은 사람들한테 집중해.”
D-“어딜 넘어가. 너 만만한 사람인 줄 알아. 열 받으면 갚아 주면 되지. 똑같이, 아니 몇 배로 갚아 주자.”
E-“아냐. 그럼 똑같은 사람밖에 더 돼? 후회할 짓 하지 말자. 이런다고 달라지는 거 없어.”
F-“그 사람 입장이 되면 또 몰라. 나라도 그럴 수 있을지도. 진짜 의도적으로 그랬겠어? 사정이 있겠지.”
G-“백 번 천 번 생각해도 아냐. 정말 내가 그랬을 거라고? 나라면 안 그랬어. 내 손모가지를 건다.”
H-“이해라는 걸 하려고 하지 말자. 이해할 수 없는 걸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 상처만 더 생겨.”
I-“그 사람들한테 넌 안중에도 없었어. 어차피 우선순위는 아니었을 걸? 인정하긴 싫지만 사실이야.”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원망스러웠다. 그들은 잘 먹고 잘 산다. 물론 그들이 불행하길 바란 적은 없다. 내가 괴롭다고 그들까지 괴로울 필요는 없지. 내 마음이 편해지진 않을 것이다. 다만 일종의 보상 심리였다. 내게도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을,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도록 좋은 일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공평하잖아요. 그런데 왜 나만 이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는 건가? 원하지도 않은 이 늪에, 터널에 왜 갇혀 있어야 하는 건가? 방 안에서 틀어박혀 거울 속 나를 보고 생각했다. 여전히 답답했다. 숨는다고 달라지는 게 없었다. 다시 그들과 마주했고 그들이 날 흔들지 못한다는 걸 보여주려고 무리도 했다.
나중에 깨달은 건 일명 '왜 나한테만?' 이란 생각이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불행한 일은 나를 피해서 오지 않는다. 나라는 이유로 피할 수 없다. 한치 앞을 모르는 건 수많은 이들도 그렇다. 이따금 운수가 좋은 날에는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란 질문을 던진 적 없었다. 그런데 불행에는 왜 그런 질문을 던졌을까? 행운만큼이나 불행도 그렇게 일어난다. 너무나 괴로울 때는 불행 배틀을 했다.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가능성도 있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 보자. 더 충격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생겼을 수도 있다. 지켜 보자. 좋은 날이 나를 굳이 피해서 오지는 않을 것이다.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내 마음 편하자고 글을 토해 냈다. 한결같이 괴로웠던 글이 부끄러우면서도 이마저도 없었다면 어쨌을까 싶다. 하지 못한 말과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거기 있다. 한참이 지나고 내게도 변화가 생겼다. 상처 받으면 혼자 괴로워하거나 말없이 떠나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 꼭 한 번은 내 생각을 전한다. 나를 위해서다. 어차피 끝이라면 달라질 건 없겠지만 그럼에도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고생한 내게, 이해가 가지 않아 궁금하고 답답한 내가 해볼 만큼 다 해보고 후련해질 수 있으니까. 또 한편으로는 그 사람을 위해서다. 상대방도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 알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니까.
믿기지 않게도 공교롭게도 딱 내가 상처받은 상황의 상대방 입장이 되어 본 일도 생겼다. 다는 아니고 어떤 사람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사람도 아파서 그런 거였다. 그 말, 그 행동. 자기가 아파서 다른 사람을 볼 여유가 없었던 거다. 그렇다고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물론 ‘다 내 탓이다’는 생각이 아직도 나를 종종 흔든다. 가만 보자. 내가 누구를 만날 때마다 문제가 생긴다. 상대방이 다른 사람들과 만나면 그렇지 않다. 여기서 문제는 내가 아닌가. 나는 멀쩡한 사이가 불가능한 건 아닐까. 생각만으로도 우울해진다. 그럴 때는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생각한다. 소년은 계속 늑대가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다 진짜 늑대가 왔을 때는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다. 그게 현명하긴 하다. 실망만 주었던 그를 왜 믿어야 하나. 하지만 정말 모든 사람들이 소년을 믿지 않았을까? 한 사람쯤은 소년의 말을 한 번만 더 믿어 보자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나는 그 바보 같은 사람이 되기로 했다.
나도, 내 주변 수많은 사람들도 양치기 소년과 별반 다르지 않다. 늘 진실이나 진심을 드러내는 건 아니면서도 다른 이에게 진심과 진실을 기대하고 또 실망할 것이다. 그들이 상처를 줄 때마다 이제는 사람은 믿지 말아야 하나 고민할 것이다. 그래서 꿋꿋이 한 번 더 믿기로 한다. 그 한 번이 쌓여서 언젠가 늑대가 정말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늑대는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나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기다리는 늑대는 제법 좋은 의미기도 하고. 믿길 잘했다고 할 순간이 분명 한 번은 생길 테니까. 누군가에게 내가 좋은 사람이기를, 내게도 좋은 사람이 찾아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상처를 아예 주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상처받을 사람의 마음을 한 번 더 생각해 볼 것이다. 나와 당신이 좀 덜 상처 주고 상처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당신이 지금 아파하고 있다면 덜 아팠으면, 그만 아팠으면 좋겠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