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사막을 걸으면 보름달이 수놓고 별이 빛나는 길을 걸을 수 있겠지
좋은 사람의 새로운 의미를 알려준 것은 토이의 오랜 곡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이지만 좋아할 수는 없는 사람. 네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달려오지만 나는 초라하게 혼자여도 괜찮단다. 정말 진심인거냐. 내 친구였으면 뜯어말렸을 것이다. 두 번 좋았다간 둘째가라면 서러운 호구가 되겠다. 그 노래 주인공 같은 좋은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그는 진짜 좋은 사람이 아니다. 정말 좋은 사람은 나 자신이나 당신에게도 좋은 사람. 나와 당신 모두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말은 쉽게 해도 내가 바로 저 노래 같은 호구일 때가 많았다. ‘호구설’의 시초. 학교 끝나고 친구를 집에 데려다 주었다. 내가 좋아서 친구를 기다렸고, 데려다주고 멀지만 길을 돌아왔다. 아끼는 친구니까 얘기도 하고 좋지. 그날도 청소당번인 친구가 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른 친구가 내 뒤에서 내가 노예냐, 호구 아니냐고 했다. 내가, 호구라니. 내 마음을 표현하면 한심한 바보가 된다는 게 신기하고 싫었다. 생각해 보니 친구가 나를 데려다 준 적은 거의 없었다. 정말 자발적 노예였나. 그 말이 충격적이고 다시 듣기 싫어서 예전만큼 잘 해주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다. 반이 바뀌어 친구와도 저절로 멀어졌고. 고작 말 한마디에 의심을 품다니 우습지만 주고받는 걸, 본전이란 걸 생각하게 되었다.
친구면 그나마 다행이다. 어떤 이들은 친구라고 부르기에도 뭐하다.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청하고, 또 청하고 사라졌다. 우리가 친해진 줄 알았는데 언제 그랬나 싶더라. 도움 인출기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도움을 준 게 아니라 이용당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고, 속이 헛헛했다. 내가 진심으로 그들을 위하는 마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말로는 당연히 도와야지 했지만 당신이 나를 인정하고 신경 써 주기를 기대했던 모양이다. 오는 게 있으면 그 정도는 와야 한다는 간단한 공식.
그렇다고 내가 주기만 하거나 불행하게 이용당하기만 했을까? 누군가를 이용하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했지만 누군가는 나 때문에 같은 이유로 씁쓸하게 목울대를 울렸을 것이다. 도움과 이용이란 그렇게 상대적이다. 주기만 하는 좋은 사람 혹은 받기만 하는 나쁜 사람만 있지는 않다.
좋은 사람이라 하기에는 그릇이 작다. 다른 것보다 내 문제나 아픔이 더 많이, 더 크게, 더 깊이 보인다. 그런 무조건적인 존재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엄마 같다는 소리만 들어도 아차 싶다. 엄마도 아닌데 엄마처럼 당연하게 나를 내어 주고 필요할 때마다 찾는 존재가 되기 싫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써도 채워지는 화수분도, 공공재도 아니니까. 나를 당연히 여기거나 함부로 하는 사람 때문에 나를 놓치고 싶지 않다. 크게 주는 것도 아니지만 복잡하다. 끊임없이 주면 무엇으로 살고 버티는 걸까? 무엇이 채워질까? 그렇다면 세상은 왜 우리에게 사람 좋으면 손해라고 할까? 이것도 인생 조언인가?
당신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다.
인생의 시점에서는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겠지만 당신과 나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펼쳐진다. 당신이 눈앞에 놓인 순간에 힘들어 하고 있다.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당신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평생 남이었을지 몰랐는데도 우리는 굳이 시간을 들여 서로를 우리라 부를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설레지도 않고 익숙하다 못해 뻔해졌을지언정 우리는 이 번거롭고 어려운 과정을 무사히 통과하지 않았나. 도움을 줄 수는 없어도 우선은 나란히 걷겠다. 당신과 함께라면 사막을 걸어도 꽃길 같다는 거짓말은 못 하겠다. 그래도 보름달이 빛나고 별이 수놓는 보름달 길, 별 길은 걸을 수 있겠지.
그러나 무엇보다 내게 좋은 사람이고 싶다.
내 역할 중 나라는 역할이 가장 등한시되어 있다. 누군가의 무언가로 사는 게 먼저라 나 자신의 무언가가 없어 헛헛했던 것은 아닐까? 매일 내 초상이 희미해져서 여기 곳곳에 내가 있지만 실은 한순간도 제대로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세상이 말하는 건 아닌가. 좋은 사람 좋지.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울 것 같냐고. 그런데 세상은 알까?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명확하게 말해 줄 수 있을까? 인생을 따라 들고 가도 좋은 질문 같아 궁금한 마음으로 걸어가 보려 한다. 뚜렷해지기를 바라며. 무엇이 진짜 좋은 사람일지, 내 생각은 맞을지,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하고도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을 만큼 내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