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책을 읽게 됐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 11~21권. 이전에 1-10권을 읽을 기회가 있을 때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빠르게 읽을 수 있을지가 걱정이어서 넘겼는데 이번에는 그때의 아쉬움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아 냅다 신청을 했다. 수사는 수도회에서 함께 생활하는 남자 신자를 뜻한다고 한다. 신부도 아니고 일반 신도도 아닌 존재라니, 불교로 치면 보살에 가까운 것일까? 가톨릭교에 대한 개념이나 지식이 많지 않지만, 명색이 수사물인 만큼 먼저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 정해진 시간 안에 10권의 책을 다 읽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변명의 여지가 없다.
흡입력이 있고 재밌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책장이 빠르게 넘어가지 않은 까닭은 날씨는 많이 덥고, 일을 끝내고 들어와 밤늦게 들어와 지쳐 쓰러져 잠들곤 했기 때문이며, 책을 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던 때와는 다르게 버벅거리게 된 걸 보니 다소 망가진 집중력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벌인 문제이니 해결 방안이 있다면 읽은 책(11-13권)은 이 글에 담고, 읽고 있는 중인 남은 책들은 하나씩 늦게라도 소감을 남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세 시대를 다룬 추리소설이라는 소개를 들었을 땐 역사와 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것이란 생각이, 작가인 엘리스 피터스의 소개에 '움베르토 에코가 큰 영향을 받았다', '애거사 크리스티를 뛰어넘었다고 평가받는다'라는 문구를 보고는 심상치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직접 확인하는 게 제일이자 설레는 일이다.
거대한 지도가 그려져 있을 땐 이걸 설마 다 기억해야 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럴 필요는 없었다. 캐드펠 수사의 이야기는 전기수가 들려주는 구전 이야기 같은 느낌이 든다. 인물에 대한 설명도 상세하고, 그 사람들이 그렇게 현실과 동떨어지지도 않았다. 혹시나 드물게 나처럼 11권부터 본다고 하더라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 또한 큰 문제는 아니다. 당시를 살았던 우리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 시리즈에 대한 인상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정겨운 인간미가 있다고 답할 것이다.
"삶은 놀라운 속도와 힘으로, 불운에 개의치 않는 빠른 고동으로 익숙한 리듬을 되찾았다. 얼마든지 쓰려 뜨려 보라고, 우리는 그때마다 다시 일어나 멈췄던 그곳에서 다시 시작할 것이니 결국은 당신들이 먼저 지칠 거라고, 다들 그렇게 외치는 듯했다." p.252
"행복이란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 사소한 일들에 깃드는 법이지. 그를 바라보며 캐드펠은 생각했다. 죽을 시간이 다가오면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 사소한 일들이고, 이 작은 이정표들을 따라 마침내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세계에 들어가는 거야." p.271
"(중략) 세상 모든 사람들 가운데 오직 자네만을 내가 태어난 곳에 데려오고 싶었네. 자네 말고는 어느 누구도 내가 지금 하는 말을 들어선 안 돼. 나는 자네를 나 자신의 영혼보다도 더 잘 알고 있네. 내 영혼과 천국에 대한 소망을 귀중하게 여기는 만큼 자네를 귀중하게 여기지.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자넬 사랑하네." p.280
11권 "위대한 미스터리"에서는 줄리언 크루스의 행방을 찾는 과정을 담고 있다. 줄리언 크루스는 휴밀리스 수사와 결혼하기로 했지만,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가 그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되면서 부득이하게 파혼을 하게 됐다. 파혼 후 줄리언은 수녀원에 들어간다며 사라졌는데 어느 수녀원에서도 그녀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수녀원으로 줄리언을 배웅해 주었던 4명의 하인들의 이야기를 각각 들어보고, 그때 가지고 있었던 장신구와 은촛대 등을 통해서 줄리언의 자취를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추리소설의 전통적인 특징은 처음 의심이 되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범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휴밀리스 수사는 자신의 고향에 들러 누군가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세상을 떠났고, 줄리언은 그의 죽음 후에 돌아와 있었다. 그 감사한 사람이 누구인지, 줄리언은 어떻게 돌아왔는지를 써버린다면 내 마음만 편해지는 일이니 자세한 내용은 읽어보시는 걸 추천한다. 추리소설을 많이 읽었다면 이 사건의 전말을 아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지만 촉이 생기게 된다. 11권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그럼에도 그 안에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아무 말 없이 지극히, 극진히,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며 함께 하는 것이다. 진한 스킨십이 없더라도 이곳의 사랑은 진하고 때로는 자극적이며 언제나 빛이 난다.
다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일 에일노스와 함께 살인이라는 추악한 사건을 묻어버리고 싶을 뿐이에요. 시내와 교구의 주민들이 평온한 마음으로 나날의 일을 이어가고 새 교구신부, 가능한 함께 지내기 수월한 신부가 큰 문제없이 여기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게 제 유일한 관심사죠. p.229
다른 보잘것없는 이들도 하나둘 모여들었다. 에일노스에게서 신분에 관한 의심을 받았던 교회 일꾼 아일가. 에일노스가 지나치게 바짝 쟁기질을 하는 바람에 경계석을 옮기는 소동을 벌였던 에드윈, 에일노스 때문에 아이에게 세례를 주지 못하고 결국 축복받지 못한 땅에 무덤을 마련해야 했던 켄트윈. 그리고 늘 에일노스의 흑단 지팡이가 미치는 거리 너머에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힘들게 깨치고 수업에 들어가야 할 때마다 벌벌 떨었던 소년의 아버지들...... p.253
12권 "어둠 속의 길 까마귀"에서는 홀리 크로스 교구의 신부가 세상을 떠나면서 36살의 에일노스 신부가 새로 도착하게 된다. 신부는 가정부 해밋 부인과 그의 조카라는 베넷이라는 젊은 청년과 함께였다. 에일노스 신부는 젊고 당당하며 냉철하고 엄격한 편이라 사람들과 부딪히는 경우가 생기곤 했다. 캐드펠 수사는 그를 자비나 겸손을 모르는 사람'(p.136)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성격이야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놀랍게도 이 교구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물에 빠져 사망하고 만다. 머리에는 상처가 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그에게 적대적인 감정이나 원한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기도 중이었기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에게 세례를 해주지 않았고, 장난꾸러기 아이들에겐 매를 들었으며, 남자들의 호의를 잘 거절하지 못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자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며, 참회와 고해를 믿을 수 없어서 교회에서 여성을 쫓아내기도 했다. 머지않아 그녀는 세상을 떠나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죽기를 바란 건 아니지만, 그가 사라지길 바라고 있었다. 캐드펠 수사는 물에 빠진 그의 상처, 지팡이, 모자로 그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었다. 용의 선상에 오른 마을 사람들을 악한 사람이라고 치부하기만도 어렵다. 신부에게 융통성이 있었다면, 때로는 원칙 외에 예외가 있으며,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그는 아마 전임자였던 애덤 신부만큼이나 존경과 애정을 듬뿍 받으며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반대로 마을 사람들 역시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된 그에게 좀 더 너그러웠다면, 그의 입장을 이해해 주었다면 아마 사이가 나아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만약 죽을 뻔한 그를 구해주었다면, 죽을 뻔한 사람이라면 달라질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사람이 얼마나 영향력 있는 존재인지 느끼게 되면서 무섭게 느껴진다. 여담이지만, 에일노스 신부는 경찰이나 군인이 더 잘 어울렸을 것 같다. 신부라는 직업이 그에게 최적이 아니거나 또는 교구의 신부라는 직무가 최적이 아니었던 것을 그의 안타까운 불행으로 여기자. 물이 부디 그렇게 차지는 않았기를.
"아직 스물다섯 살이 채 안 된 나이에, 행복한 결혼 생활을 불과 3년밖에 누리지 못한 여인. 하지만 그녀는 안달하거나 불평하지 안고 그 쓸쓸하고 허전한 생활을 묵묵히 감내하며 자신에게 아무 즐거움도 주지 않는 사업을 참으로 꼼꼼하게 보살폈고, 외로움만으로 계속될 암담한 미래를 평온한 얼굴로 받아들이며 놀라운 에너지를 발했다. 행복하든 불행하든 삶은 하나의 의무이니, 그 의무는 철저히 이행되어야 하는 법이다. p.22
"힘센 남자가 도망칠 수도 없는 곳에 여자를 가둬두고서 온갖 좋은 말로 회유하고 설득하다가, 안 되면 폭력을 쓰는 거죠. 예전부터 온갖 곳에서 행해지던 수법입니다. (중략) 그리고 저는 주디스의 성격을 잘 압니다. 정조를 잃을 경우, 그 아이는 결혼을 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할 겁니다. 해결책치고는 아주 고약한 것이긴 하지만요 p. 137
"그는 우연히 발을 헛디뎌 늪에 빠진 뒤 그 발을 빼려고 허둥대다가 점점 더 깊이 빠져든 사람과 비슷한 처지였으니까. 장미 나무를 쓰러뜨리려 했던 일에서부터 부인의 목숨을 노리고 습격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연속적인 사건의 늪에 계속 끌려들어 갔던 거요. 그러니 자기가 마침내 다다른 곳이 아주 낯설어 보인다 해도,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이 전혀 알지 못하는 아주 낯선 얼굴이라 해도 그리 이상할 것 없지." p. 324-325
그러고 보니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거의 잊고 있었다. 수도원에서 장미꽃을 보내오지 않으리라는 건 확실했다. 보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겠지, 그녀는 생각했다. 장미나무가 밑동까지 불타버렸으니, 행복했던 결혼 생활을 상기시키는 작고 향기로운 백장미를 다시는 피워내지 못할 거야. 하지만 이제 그런 건 큰 문젯거리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유롭고 안전했다.(중략) 약간의 아쉬움이 남긴 했다. 해마다 한 송이씩 받았던 장미꽃, 짧았지만 행복했던 몇 년의 세월을 떠올리게 해주는 쓰라리면서도 달콤한 선물, 이제 다시는 그것을 받지 못할 것이었다. p.326-327
13권 "장미나무 아래의 죽음" 말 그대로 장미나무 아래에서 한 수사가 죽었다. 이 장미나무는 이 도시의 가장 큰 직물 상회의 유일한 상속인. 영국 문학의 특징인가 싶게 가끔 인물을 묘사할 때 사실적으로 폭격한다. 우리의 젊은 미망인인 주인공 주디스 펄을 '그리 아름다운 여성이라 할 수 없었다.'라고 말하는 건 독자를 위한 친절인가 보다.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은데, 우아하고, 키가 크고, 갸름하고 하얀 얼굴에 품위 있는 걸음걸이와 몸가짐이 있어서 매력적이라고 그림을 그리게 만드는 것이다.
현재까지는 장미나무 아래의 죽음이 가장 마음에 드는 이야기였다. 일단 주디스 펄은 낭만적인 사람이다. 사랑하는 남편과의 추억이 담긴 수도원 근처의 집을 기부하면서 매해 그 집의 장미나무에서 하얀 장미를 달라는 게 유일한 요구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얀 장미의 꽃말이 이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다. 순수함, 존경, 새로운 시작.
그리고 사람들은 주디스 펄이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그녀의 재산을 탐하려 한다. 여러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하자고 하는 걸 보면 그녀가 다 내려놓고 수녀원에 의탁하고 싶어 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성경의 십계명의 마지막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로 벌을 내린다면 여기서 붙잡힐 사람이 여러 명이다.
추리소설이니 한 명만 죽는 것은 고루할 수 있다. 앞서 두 권에서는 이미 한 명씩만 죽지 않았나. 2명 이상이 죽음을 맞이할 때도 됐다. 장미나무 아래에서 남몰래 주디스 펄을 흠모하던 수사를 죽인 걸로 모자라, 그녀의 집에서 일하던 사람도 죽였다. 그리고 그녀는 납치를 당했다. 낭만의 상징인 장미나무가 그 과정에서 훼손된 건 그녀가 수도원에 집을 기증하기로 한 것을 무효로 하고 다시 재산으로 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할 것 없이 다 돈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수사가 되어 얼굴만 몇 번 본 주디스에게 반해서 괴로워하는 모습도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고, 어느 날 달밤에 생각이 나서 장미나무에 들렀다 목숨을 빼앗긴 수사도 안 됐다. 정작 당사자인 주디스는 그 수사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몰랐고, 얼굴도 제대로 모르니 이 짝사랑은 정말 성공적이었던 셈이다.
범인은 잃을 게 많아서 그만큼 치밀했고, 그만큼 얻을 게 많아서 대범했다. 명탐정 코난에서 본 사람을 죽이는 수많은 이유를 봤지만, 이렇게 대놓고 돈 때문이라고 하면 차라리 솔직하다. 그리고 역시나 왠지 제 발이 저려서 말이 많은, 등잔 밑에 있는 사람이 범인이기도 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공공의 적이 잡혔으니, 주디스는 이제 더 강해졌고 자유로워졌다. 그녀는 누가 납치를 한다고 울면서 원하지도 않은 걸 억지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 고통스러울까 봐 수녀원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결국은 시간이 해결해 주는 일이었다. 늘 그녀의 조건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 대신 그녀 자체를 바라보고 이익에는 관심이 없는 백장미 같은 사람이 마침 백장미를 들고 나타났으니 말이다.
캐스펠 수사 이야기가 좋은 점은 그는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극이나 영화로 만든다면 그는 비중이 높은 조연에 가깝다. 그래서 책마다 등장하는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 있다. 그는 사건의 의문점을 유연하게 풀어가고, 그의 곁에는 매그덜린 수녀와 행정장관 휴가 함께 하고 있다. 매그덜린 수녀가 아니었더라면 젊은 주디스는 수녀가 되었다가 잔뜩 후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 그 시절에도 적극행정을 선보이는 휴는 빠르고 깔끔하게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일을 마무리해 준다. 이야기를 연결하면서도 완결성을 주는 주역들이다.
지은 죄도 없는데 책 표지마다 그려져 있는 각자 다른 사람들의 눈빛이 어색해서 안 보이게 뒤집어 두었다. 아직까지는 가설이지만, 저 표지의 눈빛이 범인 또는 주인공일 것만 같은데 어떤 게 정답일지는 지켜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어떤 면을 좀 더 강조하고 싶었는지를 염두에 두었다고 추측해 볼 뿐이다.
* 이 리뷰는 Artinsight와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