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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ve in Feb 16. 2022

시간을 찍어내는 커피 쿠폰

가족 중 해외 거주자가 있다면, 최근 몇 년간 서로를 향한 그리움과 걱정의 크기는 더욱 커졌을 것이다. 격리 기간이나 혹시 모를 감염 같은 이런저런 우려로 만남이 자꾸 지체되고 마니까. 전에는 2-3년에 한 번씩 한국에 들렀던 작은 언니네 부부는 4년 만에야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눈치 게임하듯 타이밍을 보다가 격리 기간이 사라진 잠깐의 시기를 틈타서. 해외 거주자에게 주어진 체류 가능 기간은 3개월이었다. 더 있고 싶어도 돌아가야만 했다.


'작은'언니라고 칭한 이유는 언니가 둘이기 때문. 큰 언니와는 열한 살, 작은 언니와는 여덟 살. 나이 차가 큰 늦둥이다. 주변인들은 대체로 내가 외동이라고 생각하는데, 언니가 있다고 하면 놀라고, 둘이라고 하면 화들짝 놀라고, 나이차까지 언급하면 입을 다물지 못한다. - 이런 반응이 재미있어서 처음부터 전부 말하지 않고 단계를 거쳐 공개한다. 놀라지 않는 경우는 아직까지 없었다 - 아마도 내가 외동처럼 보이는 이유는 여느 자매들처럼 부대끼며 자라지 않아서겠지. 언니들이 나를 부둥부둥 키우다시피 하다 일찍이 독립했으니까.


작은 언니가 이민을 간 건 내가 일곱 살, 언니가 열다섯 살 때다. 언니가 떠나는 이유도 모른 채, 멀리 간다는 사실만 전해 듣고는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댔던 기억이 또렷하다. 낮잠을 자다가도 언니 전화 한 통이면 벌떡 일어나 꺼이꺼이 안부를 물었다. 당시 언니는 수화기 너머 눈물범벅인 어린 동생의 모습이 훤히 그려져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내가 타자 치는 법을 배운 뒤로는 펜팔 하듯 장문의 메일로 서로의 소식을 전했고,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나서부터 카카오톡이라는 편리한 수단을 활용해 시시때때로 소통할 수 있었다. 함께 지낸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더 길어지고, 영상통화나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서로의 상황을 수시로 공유할 수 있게 된 만큼 애틋한 마음은 덜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이번 방문은 달랐다. 미루고 미루다 얻게 된 만남이었고, 언니와 남편 둘 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온 만큼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기회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만난 언니 부부의 한국 동행은 이번으로 두 번째였다. 차분하고 여유 있는 분위기를 지닌 둘은 온종일 붙어 지내도 밤늦게까지 침대맡 대화가 이어질 정도로 사이가 좋고 잘 맞다. 형부는 미국인이라, 나를 포함한 가족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서로 활발해진다. 모르는 단어는 섬세한 몸짓으로, 리액션은 풍부한 표정으로 채워가면서. 아내의 가족과 내내 붙어 지내려면 힘들고 지칠 만도 한데, 불평 한 번 없이 따스함을 유지하는 모습에 인내와 배려 이해심을 -배우고 싶었지만 배우진 못했고- 마음 깊이 느꼈다.


둘이 머문 삼 개월 간, 우리 가족의 최우선 순위는 언니네 부부 그리고 가족이었다. 언니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 가고 싶은 곳, 형부가 하고 싶은 것으로 일상을 채웠다. 고백하자면, 때로는 질투도 났다. 타지에서 자란 딸이 아픈 손가락처럼 애틋할 부모님 마음도 이해가 가지만, 언니를 귀한 손님 대접하는 만큼 내겐 무심해지는 태도가 서운했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언니는 나를 좀 더 챙기라고 부모님께 속삭이곤 했다. 그럴 때 보면 언니와 동생 관계, 막둥이 체질은 암만 나이를 먹는대도 어쩔 수 없구나 싶기도 했다.


우리는 거의 매 주말마다 함께였다. 주말 중 하루는 무조건 가족과 보내기로 마음먹고 약속을 잡지 않았다. 평소라면 하루를 쪼개고 쪼개 두세 개씩 약속을 잡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을 나였다. 누군가와 보내는 시간을 고정해 둔다는 건 큰 변화이자 다짐이었다. 연인과도 '고정적인 만남의 요일'같은 건 두지 않을 정도로 개인적인 시간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재고 따지고 아끼고 아껴 사용하던 연차도 이때만큼은 아낌없이 썼다. 참 다행인 건, 이런 노력을 언니도 알았다. 언니는 베풂이 익숙하고 표현에 아낌이 없는 사람이라 늘 고맙다는 말을 먼저 건넸다. 아무리 작은 거라도 상대의 입장을 헤아려 공감하고, 진심으로 고마워할 줄 아는 건 능력이자 지혜다. 이런 사람이라면 친언니가 아니더라도 베풀고 싶어질 것 같았다. 나도 리액션이 좋은 편이라 생각했지만, 미간 주름 여럿 잡아가며 찐 텐션으로 호응하는 미국 리액션을 따라잡을 순 없겠더라.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언니 부부가 다시 인천공항으로 향한 날, 나는 출근을 해야 했다. 하루하루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했대도 아쉬움은 컸다. 퇴근 후 싱숭생숭한 기분을 안고 도착한 집은 텅 빈 느낌이었다. 대신 내 책상에 언니가 남기고 간 것들이 보였다. 깨알만 한 글씨로 여백 하나 없이 빼곡한 엽서 한 장과 폴라로이드 카메라, 커피 쿠폰 두 장이 놓여 있었다. 언니와 형부가 자주 가던 동네 단골 카페와 이태원에 있는 헬카페 로스터스 쿠폰이었다. 당장 찾아가면 커피 한 잔씩 건네받을 수 있게 도장이 꽉 채워진. 형부는 단골 카페의 컵케이크를 좋아했고, 언니와 엄마, 나는 헬카페 카푸치노를 좋아했다. - 커피를 내리자마자 다가와 잔에 따라주시며 바로 입대고 마시길 권유하시는데, 그때의 온기와 촉감이 추운 날이면 어김없이 생각난다 -


쿠폰 가득 찍힌 도장 자국을 보자니 같이 보낸 시간이 선명히 떠올라서,  손으로    눈물을 쏟았다. 단지 헤어짐이 슬퍼서라기엔 훨씬 입체적인 감정이었다. 고마움과 미안함, 애틋함과 그리움, 애잔함과 아쉬움 같은 것들이 묻은. 이런 소중한 감정이 금세 날아가지 않길 바라며, 언니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표현하고 싶어 오랜만에 메일을 썼다. 핸드폰이 없어 어린 시절처럼. 그리고 메일을 적으면서 감정의 이유를 알았다. 언니는  받아주는 입장이었다. 힘들다는 말을 꺼낸 적도, 투정 부린 적도 없다. 부모님이 작은 언니를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고인다고 말씀하신 이유를     같았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나도 언니가 기댈  있을 정도로 단단해졌다고 말하고 싶었다. 막둥이 동생을 떠나, 마음 터놓고 기댈  있는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메일에 담았다.


"마치 처음 떨어지던 날 같은 기분이야.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서러울 뿐이었지만, 지금은 감사한 마음이 가장 크네. 언니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넓고 깊은 마음으로 품어주고, 보듬어주고, 감싸준 덕에 나는 사랑을 베풀 줄 알게 되었어. 삐죽삐죽 날카롭고 모난 데 많은 동생을 늘 사랑으로 대해줘서 고마워. 고맙다는 말 이상의 표현이 있다면 좋을 텐데."

P.S/ 나를 키운 건 사랑이 팔 할이더라. 무한한 사랑을 건네준 덕분에.


언니가 떠난 뒤로 동네 카페에 몇 번 갔지만 쿠폰은 꺼내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 쿠폰들을 쓸 일은 없을 것 같다. 커피 한 잔과 맞바꾸기엔 그 안에 담긴 시간들이 너무 소중하니까. 그리움을 붙잡을 새도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연락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감정을 간직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는 몇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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