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살아보려 애쓴 시간들
어느덧 시간이 꽤 흘렀다.
가벼운 종이 한 장으로 관계가 정리되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그 이후로 나에게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지만,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솔이의 부모로 남는 일, 그 이름 아래
우리는 주말마다 얼굴을 마주했다.
겉으로 보기엔 다를 바 없는 삶이었고,
솔이에게도 특별히 달라진 건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모든 게 나아졌어야 했다.
솔이를 향한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고,
상담심리치료학과에 진학해 공부하며,
상담을 통해 내 상처를 하나씩 정리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주일에 단 하루인 그날은
늘 대화가 싸움으로 끝났다.
아무 일도 없는데도 나는 지쳐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알게 되었다.
문제는 ‘이혼한 남편’이 아니라,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역할을
그대로 붙잡고 있던 나 자신’이었다.
그는 여전히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두었다.
예전엔 그걸 치우고, 정리하고, 설거지도 가끔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왜 안 치워?”
“이제 이 공간은 네 공간이니까 내가 건들기 좀 그래서…”
“그럼 그 옷들은?”
“그건 고칠게.”
달라진 건 서류뿐이었다.
그의 태도도, 생각도 그대로였다.
그는 내가 아직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함부로 굴어도
결국 내가 받아줄 거라 믿는 듯했다.
그리고 사실,
나는 그 미련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다.
솔이와 손을 잡고 걷다 보면,
아빠와 함께 다니는 아이들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마음 한편이 쿡, 하고 쑤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게 주문을 걸었다.
“잘했을 거야.”
“잘한 것이어야 해.”
“잘한 거야.”
그러던 어느 날,
결정적인 말을 들었다.
그는 시댁에 말하겠다고 해놓고,
아직 부모님께
이혼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태연하게 말했다.
“그래도 결국 솔이 크면 우리 둘밖에 더 있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알았다.
이 사람은 아직 ‘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혼을 단절이 아닌, 잠시의 휴전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래서 우리의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마음에서 정리가 끝나지 않은 두 사람이,
서로를 눈치 보며
감정을 숨긴 채
‘공동 양육’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
그게 우리의 진짜 문제였다.
나는 이혼을 받아들였지만,
미련은 남아 있었다.
그는 이혼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 여지를 지워내야 했다.
이제와 다시 기댈 수는 없다.
나의 삶은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
그리고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불행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갈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는 불규칙한 근무 속에서
말과 행동이 점점 거칠어졌고,
솔이 앞에서도 험한 말을 서슴지 않았다.
말 한마디도 고르며 하는 나로서는
그가 내뱉는 말마다
몸이 굳고 마음이 닫혔다.
그래도 주 1회,
솔이와의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참았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의 말은 늘 짜증으로 시작해 화로 끝났다.
그를 바라보면,
검은 안갯속에 서 있는 사람 같았다.
어느 순간,
솔이가 아빠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게 싫었다.
이 집에 오는 사람마다
부정적인 말과 감정을 쏟아놓고 갔다.
제발 자제해 달라 부탁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마치 이 공간이 그래도 되는 곳처럼,
모두가 같았다.
나는 점점 지쳐갔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이 집은 이미 오래전부터 검게 물들어 있었다.
검은 안개가 걷히기 시작할 무렵,
나는 새 도화지를 꺼냈다.
하지만 미련이 남았다.
그 사람에 대한 미련만이 아니라,
이 공간에 쏟아부었던 시간과 기억,
그리고 대출을 갚고 있는 그의 안쓰러움 때문이었다.
그 미련은
사람 때문만이 아니었다.
함께 쌓아 올린 공간,
그 안에 남은 시간의 냄새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사를 결심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나는 아파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층간소음, 닫힌 문, 복도 불빛.
그 모든 게 답답했다.
그런데 집을 보러 간 그날,
솔이가 방 안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확실히 굳었다.
“이사하자.”
그에게 미안함을 뒤로한 채
조용히 말을 꺼냈다.
“나, 이사할 거예요.”
그의 표정은 살벌했다.
그래도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당신에게는 주소를 알리지 않을 거예요.
솔이는 2주에 한 번, 내가 직접 데리고 갈게요.
그 공간은 새로 시작하는 나와 솔이의 둘만의 공간이에요.
솔직히, 당신의 부정적인 기운이
그 집에 스며드는 걸 상상하고 싶지 않아요.
나에게 그곳은 하얀 도화지예요.
솔이는 핑크빛 솜사탕 같은 아이니까,
그곳에서 자신의 색으로 세상을 그릴 수 있게 해주고 싶어요.
그런데 당신이 온다고 생각하면
검은 기운이 한가득 밀려들어요.
나는 그게 너무, 너무 싫어요.
그러니,
내가 솔이를 데리고 갈게요.
당신이 스스로
정말로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느끼는 날,
그날 다시 말해줘요.
‘미안해요.’”
이건 사랑의 끝이 아니다.
나와 아이를 지키기 위한 경계선이다.
나는 이제 다시,
누군가에게 기대는 삶이 아니라
나의 말과 선택으로 서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옆에서,
솔이는 자신만의 색으로 자라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