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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일루아의 고양이 Aug 24. 2021

나만의 멍당을 찾아서

도심 속 멍 때리기를 위한 멍스팟

혼이 쏙 빠지게 바쁜 날이면 너덜너덜해진 하루의 끝에 나만의 멍당을 찾아 나선다. 광화문에서 일하던 시절 나의 멍스팟은 부암동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한 미술관. 인턴 때부터 나를 챙겨주던 선배가 '모르긴 몰라도 아마 서울에서 젤로 높은 데 있는 미술관일걸?' 하며 이끌었던 곳이다. 나를 아껴주는 이가 꽁꽁 숨겨둔 자신의 보물상자를 엿보여 준 것만 같은 장소라 더 각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경복궁역 3번 출구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부암동주민센터 정거장에 내리면 도심의 시끌벅적함을 서울 한복판에 묻어둔 채 나만의 고요한 산책길이 시작된다. 마을버스가 언덕배기를 힘겹게 오르며 윤동주 문학관을 지날 즈음부터 피어오른 기대감은 버스 계단을 내리며 땅을 밟는 순간 퐁하고 마음속에 작은 스파크를 일으킨다.



차로 오르기에도 꽤나 가파른지라 한겨울 폭설이 쏟아지는 날이면 이곳 주민들은 어떻게 다닐까 괜스레 걱정이 앞서는 골목. 덕분에 땅과 나 사이의 거리를 자분자분 밟아가며 정성스레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속도의 시대에 광속의 틈새에서 놓치는 자그마한 아름다움에 다시금 눈 뜨는 시간이다.


경사진 언덕길은 정면에서 다가오는 이의 마스크 쓴 얼굴이나 휴대폰 액정에 고정되었던 우리의 시선을 자연스레 땅으로 향하게 한다. 평소에는 배경화면처럼 페이드 아웃된 땅 위의 다채로운 풍경이 그제야 제대로 마음에 들어온다.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개미를 관찰하던 베르베르의 어린 시절도 이런 시선에서 자라난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저 노랗게만 흩뿌려져 있던 낙엽들의 얼굴에 가득한 주근깨도, 계절의 흐름을 미리 온몸으로 맞아 바삭하게 익은 고동색 낙엽들도 눈에 띄기 시작한다. 주변의 속도가 아닌 나만의 시간대로 바라보는 세상에선 한결 생동감이 느껴진다. 무채색 도시에 무뎌졌던 시선이 만화경을 통해 세상을 홀린 듯 바라보는 기분이 든다.


 

매일같이 모니터 앞에서 응고된 연두부 같은 체력인지라 조금만 올라도 금세 숨이 차오른다. 잠시 호흡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본다. 목덜미 뒤로 간질간질 불어대는 바람과 고소한 낙엽 내음이 초겨울 군밤 할아버지를 처음 영접했을 때만큼이나 반갑기만 하다.


업무 중에는 잠시 책상 속에 넣어두었던 후각이나 촉각 같은 도태된 오감이 속속 서랍을 탈출한다. 사회생활을 하며 약점이 될 수 있는 예민함도 자연 앞에선 계절의 변화를 섬세하게 짚어내는 재능으로 변신한다. 여기가 내 자리구나,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슬렁어슬렁 언덕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미술관 앞. 계단 꼭대기에 자리 잡은 정원 앞으로 완만한 듯 웅장한 산세가 병풍처럼 촤르르 펼쳐진다.


혼자 혹은 둘이여도 말없음표가 이어진다. 신기하게도 그 침묵 속에 서로를 이어주는 손길이 따뜻하게 전해진다.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장엄함 앞에서는 되려 침묵이 농밀한 대화를 이끌기도 하는 법이니까. 동행한 이가 나 자신이든 또는 살가운 벗이든 한층 가깝게 엮어주는 고마운 침묵이다.


 

정겨운 벽돌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오래오래 지긋이 바라본 게 언제였을까? 산세를 천천히 훑어내려가다 보면 올망졸망 귀엽게도 무리 지어 있는 마을이 보인다. '이 동네 사람들은 오늘 저녁에 뭘 해 먹으려나?'가 먼저 떠오르는 걸 보니 이것도 나름 등반이었다고 그새 배가 고파온다.


평소엔 의식의 흐름을 따라 잡념이 이어지다 보면 후회의 되새김질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마무리되기 일수였는데 이곳에선 잡념의 농도가 한결 옅다. 끈적끈적한 고민일랑 툭툭 언덕 아래로 털어버리고 속세로 돌아가 육체의 정직한 반응에 정중히 답해줄 시간이다. 뱃속도 머릿속도 맑게 비우고 돌아가는 걸 보면 오늘의 포맷도 성공적. 역시 멍당은 배신하지 않는다.


<눈 속의 사냥꾼들>, 피테르 브뤼헐, 1565,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나만의 멍상처 풍경과 묘하게 오버랩되는 그림이 있다. 우리에게는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이라는 작품으로 더 잘 알려진 네덜란드 화가 피테르 브뤼헐의 작품이다. 계절의 변화에 매료되었던 브뤼헐은 사계절을 묵묵히 살아내는 민중의 평범한 일상을 포착해 섬세하게 그려냈다. 눈 속의 사냥꾼 이외에도 한여름의 옥수수 수확 등을 그린 계절 연작을 남겼는데, 모두 조금 높은 곳에서 아랫 세상을 내려다보는 조감도적인 시선으로 풀어냈다.


겨울이 정점에 다다른 1월. 세 명의 사냥꾼과 열세 마리의 사냥개가 하루 종일 산속을 누비며 잡은 사냥감은 겨우 자그마한 여우 한 마리. 한겨울 밤의 매서운 칼바람은 추위에 단련된 사냥개들조차 몸을 웅크리고 꼬리를 말게끔 한다. 배도 고프고 마음은 더 고픈 사냥꾼들은 언덕 아래 점점이 흩뿌려진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세히 보면 꽁꽁 언 호숫가 스케이트장엔 엎어진 사람이 셋이나 보인다. 잠시 허기를 잊고 피식 웃었까? 평소엔 높다랗게만 보이던 마을 유지의 솟을지붕 집들이 아담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로부터 높은 데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행위는 권력자의 특권이었다. 내 인생조차 때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소시민이 시선의 권력을 누리려면 세상보다 조금 높은 곳에 오를 수밖에. 언덕 위에서 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며 그동안 나를 짓눌러왔던 고민과 불안감에 대해 권력을 행사한다. 고정된 시선에서 벗어나니 번뇌의 크기가 비빔면 위에 뿌려진 깨소금만큼이나 앙증맞게 줄어든다. 어찌어찌 또 살아가 볼만하다는 깨소금만큼의 용기를 얻고 언덕길을 내려온다. 1월의 사냥꾼들도 모두 그런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고 바라보면서.


멍 때리기는 모든 고민을 파도처럼 씻어 내리지는 못한다. 그저 팽팽했던 정신줄을 잠시 느슨하게 풀어주는 마음의 이완 운동일뿐이니까. 하지만 일상의 피로가 후회와 불안과 뭉쳐 사막의 모래폭풍처럼 몰려오는 순간이면 잠시 나만의 멍당으로 피신해보자. 멍상을 하고 난 날이면 그런대로 또 하루, 다시 인생이 조금 만만해지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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