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일루아의 고양이 Jul 23. 2021

차멍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

정갈한 차 쟁반 두 개가 상 위에 놓였다. 은은하게 우러난 색감을 눈으로 음미하기도 전에 이미 그윽한 차향이 콧속으로 스며든다. 음소거라도 된 듯 한결 차분해진 찻집 안. 고요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평온한 순간이다. 커피는 누구와 마셔도 그런대로 좋지만 차 한 잔만큼은 침묵조차 편안한 이와 함께 하고 싶다. 둘이 있어도 혼자만의 세계로 침잠하는 찰나를 서로 존중해줄 수 있는 사이. 제대로 차 한 잔 할 수 있는 친구, 다우(茶友)란 그래서 소중하다.



차를 즐길 수 있는 물리적인 나이란 정해진 바 없지만 차 마시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삶의 시점이란 존재하는 것 같다. 어린 시절 평상 앞 방석에 앉아 가만히 찻물을 내리시던 엄마의 뒷모습이 이제는 낯설지 않게 내게 겹쳐진다. 차가 우러나길 기다리는 시간은 세상의 속도를 허덕이며 따라가다 잠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삶의 매무새를 가다듬는 순간 같다. 아늑하고 편안하다. 잔잔히 퍼지는 차향을 맡으며 연다홍빛으로 물들어가는 찻물을 바라보는 이 순간 살아있음을 느낀다.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르고 각자의 침묵에서 깨어난 다우(茶友)와 달달한 다식까지 나눠먹으면 번뇌를 비운 자리가 꽉 차게 행복하다.



홀로 명상하듯 쉬어가며 마시는 차 한 잔도 좋지만, 벗과 마시는 차는 경험을 나누는 재미가 있어 또 그만의 맛이 있다. 여러 가지 색다른 차를 함께 시향 하며 어떤 차를 마실지 즐거운 고민에 빠진다. 앙증맞은 다식을 보며 와아~하고 감탄사를 동시에 내뱉는 순간도 신난다. 무엇보다 따뜻한 차 한 모금이 입안에 감기는 순간, 아침 산을 오르다 저 먼 봉우리에 걸쳐진 운무를 함께 바라보는 기분이 다.


여기까지 오르느라 숨찼지?
그래도 저 안개구름을 같이 볼 수 있어서 참 좋다.

이런 대화가 고요히 눈빛으로 오가는 시간. 결 고운 이와 차를 마시면 숲 속에서 새벽 명상을 마치고 나온 듯 마음이 말그레해진다. 차 한 잔으로 도반이 생긴 것만 같아 든든하다. 향긋한 응원을 받았으니 숨 가쁜 세상을 다시 마주할 힘이 난다.



차문화가 여유로운 오후를 즐기는 귀족들만의 전유물에서 점차 대중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된 서양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양반들의 사교용 고급문화로 자리매김 해왔다. 흔히 차를 마신다하면 대용차인 인삼차 등을 의미했고, 일반 백성들은 몸이 아플 때나 돼서야 비로소 약용 음료로서 차나무 잎을 우려낸 차를 접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차문화가 가장 발달했던 고려시대에는 다례를 거행하는 다방(茶房)이라는 관청을 궁궐 내에 개설할 정도로 차 보급이 활발했지만, 여전히 외국 사신을 대접하거나 국가 대소사를 관장하는 의례용 음료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시대에는 다시(茶時)라 하여 일정한 시간을 정해 차를 여유롭게 즐겼다 하니 영국의 애프터눈 티 문화에 버금가는 우리네 조상들의 멋진 풍류가 아니었나 싶다.



영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을 보며 숨 막힐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하는 다도에 감탄하면서도 '겨우 차 한 잔에 저렇게까지 할 일인가?'싶었던 적이 있다. 규범을 극도로 중시하는 선종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다도. 그 이면에는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지금 이 시공간에서 경험하는 다회를 소중히 여기는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정신이 서려있다. 때문에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수건 접기라 할지라도 온 마음을 다해 정성껏 접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한 번 삶을 놓아버리면 살아가는 내내 허투루의 인생이 이어진다는 묵직한 교훈. 이 얇은 천 하나에 드넓은 우주의 무게가 담겨있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를 추구하는 삶이다. 불교 용어로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을 의미하는 일상다반사. 참선 수행에는 특별한 왕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매일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일상의 행위들이 모여 결국 선(禪)으로 이어진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구도의 길이 수건 접기보다 쉽게 다가오니 매일 마시는 차 한 잔이 돌연 더 달게 느껴진다.


사진출처: 공부차


차문화가 주는 가장 큰 위안은 어쩌면 이 금박 입힌 다구에 있지 않을까? 차를 가까이하는 이들에게 다구는 단순한 도자기를 넘어 구도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도반의 의미가 크다. 때문에 아끼던 다구가 깨지면 버리고 새 다구를 들이는 대신, 깨진 조각들을 모아 금은박을 입혀 하나로 이어준다. 정성껏 수리한 다구는 그 의미와 새로운 미학이 더해져 깨지기 전보다 오히려 가치가 높아지기도 한단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여기저기 부딪치고 깨진 나의 조각난 마음마저 어루만져주는 것 같다.


그러니 취미에 진심인 장비빨의 민족답게 영롱한 다구들부터 눈에 들어온다면 일단 어설픈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일상의 다구부터 시작하자. 이 나간 머그컵에 티백 하나 퐁 떨어뜨려도 그 순간만큼은 내 잡념도 함께 녹여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곳이 바로 차멍을 즐길 수 있는 나만의 평온한 다실(茶室)이니까.




이전 02화 나만의 멍당을 찾아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