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절 끓던 폭염을 씻기듯 가을비가 이어진 요즘. 뙤약볕에 정수리가 녹아내릴 것만 같아 그늘 밑으로 숨어 다니던 게 올여름 맞나 싶다. 어느새 다 잊고 따뜻한 라테 한 잔 품고픈 시기가 찾아왔다. 불가에 앉아 장작 타들어가는 리듬에 나를 맡기는 그런 계절이.
몇 년 전 서울을 떠나 시골살이를 시작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간직했던 로망 하나를 실현했다. 드디어 거실에 벽난로를 들인 것이다. 고가인 만큼 디자인도 매끈한 유럽산 벽난로에도 잠시 마음을 빼앗겼지만, 결국 집으로 맞이한 것은 군고구마 서랍이 장착된 한국형 벽난로였다. 가격도 유럽산의 사분의 일. 투박한 모양새지만 열기도 후끈후끈, 무엇보다 불길 위로 고구마며 밤, 옥수수가 구수하게 익어가는 냄새가 가심비마저 사로잡는다. 벽난로는 이제 단순하고도 원초적인 행복을 선사하는 우리 집 최고의 애장템이 되었다.
어두운 밤 넷플릭스 몰아보기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타오르는 불길에 시선을 빼앗기곤 한다. 남편이 벽난로를 정글 TV라 부르는 이유를 그제야 실감하는 순간이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에 맞춰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불춤을 보고 있노라면 무중력 상태로 붕 떠있는 기분이 든다. 머릿속을 꽉 채우던 고민도 불길에 재가 날아오르듯 두둥실. 몸은 따뜻하고 마음은 가벼우니 더 바랄 것 없는 밤이다.
맞다, 벽난로 서랍에 군고구마가 남아있었지?
후후 불어가며 한 입 야무지게 베어 물면 사는 게 뭐 별건가 싶다.
<벽난로가의 잭과 코티 예이츠, 달팽이 성, 데본>, 존 버틀러 예이츠, 1900
난롯가에서 마음까지 녹여낼 때면 존 버틀러 예이츠의 그림이 떠오른다. '예이츠'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은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지만, 이 벽난로 풍경은 그의 아버지 존의 작품이다.
원래 변호사였던 존은 서른이 다 될 무렵에서야 미대에 진학하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상화에 능했던 그에게는 작품 의뢰가 끊이지 않았지만, 사업 수완이 부족했던 존은 아일랜드는 물론 영국에까지 수차례 이사를 다녀야 할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다고 한다.
안정된 삶이 보장되었던 변호사의 길을 접고 서른 언저리에 꿈을 이루기 시작한 존. 그는 화가로 전향한 것을 후회했을까? 아늑한 난롯가의 온기가 잔잔하게 느껴지는 이 작품을 보며 나름의 답을 찾은 것만 같았다.
그림 속의 두 주인공은 존의 아들 내외. 6남매 중 막내인 잭은 아버지의 예술혼을 고루 물려받은 형제자매들 중에서도 아버지와 쏙 빼닮은 길을 걸어갔다. 대를 이어 초상화로 명성을 떨친 화가가 된 잭은 아일랜드 최초의 올림픽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화가와 올림픽이라니, 어째 생소한 조합 같지만 올림픽 개최 초기인 1912년부터 1948년까지는 스포츠 외에 예술 부문도 함께 경쟁했다고 한다. 미술, 조각, 음악, 문학 그리고 건축에 이르는 총 5개 부문에서 스포츠를 주제로 한 예술 작품들을 올림픽 무대에서 심사했다. 이후 스포츠 선수들은 아마추어인 반면 예술가들은 프로페셔널로 분류해야 한다는 논쟁 끝에 스포츠 부문만이 올림픽 종목으로 남았다고 한다. 잭은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수영'이라는 작품으로 은메달을 수상하며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화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시가를 든 (잭) 예이츠>, 앨리스 보턴, 1904년
대를 이어 꿈을 이룬 막내아들이 25세 때 처음 장만한 집은 달팽이들이 득실거리는 폐가 같은 곳이었다. 아들 내외는 이런 환경에 굴하지 않고 농담 삼아 '달팽이 성'이란 애칭까지 지어주며 허름했던 이곳을 포근한 삶의 터전으로 가꾸어 나간다. 존이 이 작품을 그린 것은 아들 부부가 이사한 지 사 년째 되는 해였다. 훈훈한 난롯가 앞에 앉아 독서 삼매경에 빠진 며느리와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막내아들. 이날 밤의 온기를 오래도록 간직하고자 했던 아버지 존의 붓질에는 삶의 충만함이 진하게 묻어나지 않았을까?
존 버틀러 예이츠는 6남매에게 예술적 감수성뿐만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진정 소중한 가치를 찾아내는 혜안도 함께 물려준 것 같다. 장남 윌리엄의 시에서도 이 가족을 관통하는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잔잔한 불멍의 시간, 고뇌를 활활 불태우고 재로 가볍게 날려버린 그 자리에 소소한 행복이 들어설 자리가 넉넉하다. 군밤 내음 같은 우리 가까이의 행복이.
그대 늙었을 때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그대 늙어 머리 희고 잠이 많을 때
난롯가에 앉아 졸게 되거든 이 책을 꺼내 보세요.
그리고 천천히 읽으며, 한때 그대 눈이 지녔던
그 부드러운 눈길이며 깊은 그림자를 꿈꾸세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대의 다정하고 우아했던 시절을 사랑했고,
그대의 아름다움을 거짓 혹은 진실함으로 사랑하였던가를.
다만 한 남자가 그대 순례자의 영혼을 사랑하였고,
그대 변해가는 슬픈 얼굴을 사랑하였던 것을.
그리고 빛나는 창가에 고개 수그려
조금은 슬프게 중얼거려요.
어떻게 사랑이 달아났고 높은 산을 거닐며
별들의 무리 속에 그의 얼굴을 감추었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