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방심한 뒷모습을 좋아한다. 무방비 상태의 그 모습에선 화장기 없는 민낯의 홀가분함이 전해진다. 뒤따르는 내 시선마저 무장해제시키는 낯선 이의 뒷모습. 때론 쓸쓸하기도 하지만 강원도 고성 앞바다에서 접한 해남의 뒷모습에는 어딘가 숭고한 면모가 서려있었다. 잠시 숨죽이고 지켜본 것은 토요일 아침 새벽 다섯 시 삼분의 일이었다.
친구와 일찍 떠난 여름휴가. 강릉이나 양양보다 조금은 한적한 바닷가를 찾아 고성으로 향했다. 아야진 해변길에 위치한 숙소의 3층에 오르니 말 그대로 바다가 눈앞에 짙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고성의 여러 해변들 중에서도 자그마하고 아직은 호젓함을 간직하고 있는 청간해변. 이곳에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다녔던 그 익숙하고도 정겨운 바다의 모습이 여태 남아있었다. 타임머신에 잠시 웜홀이 열리듯 어촌계에 외지인을 위한 통로가 일순 생겨난 듯한 신비함이 느껴지는 곳. 그 기이한 부조화가 처음부터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곧 죽어도 아침형 인간이니 미라클 모닝 따위를 실천할 수 없는 나지만, 이런 곳에서만큼은 해가 중천에 뜨도록 코를 골고 있을 순 없는 법이다. 친구와 늦게까지 바닷바람을 맞으며 술 한 병에 바비큐를 즐기고 해변에서 소박한 불꽃놀이를 펼친 어느 커플의 즐거움을 함께한 밤이 사윌 무렵, 새벽 다섯 시에 알람을 맞춰놓고 기절한 듯 잠에 들었다. 모름지기 동해까지 왔으면 해돋이 감상은 해야 제맛이니까.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 탓인지 아쉽게도 해돋이는 살구빛 구름의 흔적으로만 볼 수 있었다. 요란한 새벽 알람이 무색한 일이었다. 이대로 다시 잠자리에 들 수는 없어 발코니에 의자 두 개를 놓고 친구와 함께 잠옷바람으로 말없이 바다멍에 빠졌다. 고성의 새벽 다섯 시는 흡사 도시의 출근시간대 같았다. 해변 앞 도로를 성큼성큼 건너는 어민들 너머로 이제 막 입수 준비를 하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청간해변의 물길을 여는 해남의 뒷모습이었다.
잠수복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꽤나 오랜 시간 해변 끝 바위 위에서 준비를 하던 그가 마침내 주홍빛 부표와 함께 저 검푸른 새벽 바닷속으로 풍덩 사라졌다. 숭고한 종교의식이라도 치르듯 조심스럽고도 절도 있는 그의 동작 하나하나를 숨 죽이며 지켜보던 시간은 분명 몇 분 안 되는 짧은 순간이었겠지만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적막하게 느껴졌다. 어느새 두 개의 검붉은 점이 되어 시야에서 점점 사라지는 그의 모습. 잠이 덜 깬 몽롱한 새벽임에도 마음속에 물수제비라도 던져진 듯 잔잔한 여운이 나지막이 퍼져나갔다.
해남이 멀찌감치 사라진 검푸른 고성 앞바다를 보며 떠오른 작품이 있었다. 임채욱 작가의 <Blue Mountain> 연작.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전국의 산맥을 동양화 붓이 아닌 카메라 렌즈로 찍어 사진 인화지가 아닌 한지에 구현한다. 회화적 사진을 향한 그의 시도는 사진이지만 산수화 같은 신비한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겹겹이 포개진 산맥은 작가가 사용하는 매체의 중첩과도 묘하게 어울려 어느새 작품이 안개처럼 잔잔히 마음에 휘감긴다.
<Blue Mountain 2147>, 임채욱, 2021
안개 자욱한 산속의 새벽녘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동틀 무렵의 검푸른 바다와도 닮아있다. 오직 나와 자연만이 일대일로 대면한 순간. 생각이 겹쳐지고, 짙어지고, 결국은 하나로 뒤섞여 혼연일체가 되는 그 고요한 쪽빛의 시간이야말로 우리를 자연으로 이끄는 마법이 아닐까?
언젠가 학교 선생님을 하다 제주도로 내려가 해녀의 삶을 시작한 이의 글을 본 적이 있었다. 동호회 게시판에 가끔씩 올라오는 그녀의 일상은 적나라한 삶의 현장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신비로운 구석이 있었다. 가끔씩 직접 채취한 조개껍질로 공예품을 만들어 올리기도 하고 관광객에게 판매도 하던 그녀의 새로운 인생은 석양에 반짝이는 수평선처럼 애잔하고도 결연했다. 자연에 이끌려 살아가는 삶은 그곳이 적막한 심해이든 안개 자욱한 산기슭이든 고된 일상의 노동조차도 그 노을 진 뒷모습만큼은 장엄하게 비춰주는 것 같았다. 자연을 종교 삼아 무위자연(無爲自然)이 일상이 된 이들을 잠시 엿본 것만으로도 내 삶이 조금은 담백해진 듯했다.
누군가에게는 켜켜이 쌓인 밥벌이의 고단함을 파도에 떠내려 버리려 오는 이곳이, 또 다른 이에게는 여전히 고된 일상의 반복일 수도 있겠지. 비릿한 생선 내음 속에 전해지는 삶의 치열함이 녹슨 닻처럼 묵직하게 느껴진다. 바다멍을 하며 잠시 머릿속을 비우려 온 이곳에서 더 많은 생각거리를 품고 돌아온 여행길이었다.
차가운 새벽 바다에서도 오래오래 강녕하시길. 웜홀의 반대편으로 되돌아온 어느 외지인이 해신령에게 가만히 기원해본다. 저녁으로 부추비빔밥에 문어숙회를 올리며 혹여 저 신성한 뒷모습의 해남이 뭍으로 끌어온 바다생물은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멀리 동떨어진 듯 실은 우리 모두는 하나의 어망으로 연결되어있기에. 때론 떠내려가는 누군가에게 기꺼이 주홍빛 부표를 내어주고 함께 버둥거리며 살아낼 그런 우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