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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일루아의 고양이 Jul 13. 2021

기차멍

방구석 2D 기차여행

사회적 거리두기가 4단계로 격상되면서 묵호행 기차표를 취소했다. 기차 노선도를 보며 처음 들어본 역이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 위주로 동선을 짜는 설렘으로 이미 마음속에 바다내음이 짭조름한 요즘이었다. 몸이 묶여있다고 상상까지 동여맬 필요는 없는 법. 도서관으로 달려가 기차여행에 관한 책 두 권을 빌려왔다. 기차를 타고 가며 멍하니 바깥 풍경에 빠져드는 시간도 좋지만, 가끔은 이런 방구석 기차멍도 번외 편으로 나쁘지 않다. 이제 밀키스 한 캔 부은 수박화채에 얼음 동동 띄우면 방구석 기차여행 준비 끝! 



첫 책은 제목부터 '내가 기차여행의 끝판왕이다!'란 아우라가 흘러넘치는 대한민국 기차여행의 모든 것. 전국 방방곡곡의 기차역을 모두 섭렵한 후덜덜한 기차 덕후부터 온라인 철도동호회 운영자, 망상역 명예역장까지 3명의 필진이 지역별/테마별로 조목조목 짚어준 기차여행 일정이 실려있다. 코로나 시대 이전에 쓰인 가이드북이라 달라진 정보도 많지만 거칠 것 없이 자유여행 패스로 다니던 젊은 혈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여행 애피타이저로 제격이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여행 세포가 즉시 활성화된다. '우리나라에 갈 곳이 이렇게나 많다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지니 주의. 페이지를 펄럭이며 '여행 가고 싶다!'를 열일곱 번쯤 외치게 된다.



또 한 권은 건축가 오영욱의 파리발 서울행 특급열차. 오리엔트 특급 살인만큼이나 두근두근거리게 만드는 표제다. 라떼 한창 유행했던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의 바로 그 오영욱 작가의 책이라 반가움이 증폭되었다. 그 시절 여행 앓이를 하는 이라면 한 번쯤 읽어봤을 오기사의 저서는 내가 모르는 사이 공저와 역서를 포함해 17권이나 세상에 나와있었다. 젊은 시절을 함께했던 유명인사의 근황을 오랜만에 접하면 마치 소꿉친구의 소식이라도 들은 양 순수한 기쁨이 솟아난다. 그동안 참 바지런히도 살아오셨네요, 감탄과 응원이 뒤섞인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여행기는 대체로 글 반, 사진 반이지만 이 책은 사진 대신 드로잉이 반절을 차지한다. 집콕 시대의 새로운 취미로 여행 드로잉을 짬짬이 연습 중인데, 이런 전문가의 일필휘지 스케치를 볼 때면 부러움을 넘어 경외감이 절로 든다. 근래 읽은 여행기 중에 가장 아날로그적인 느낌이 들었던 이유도 거친 재생지를 넘길 때의 촉각과 더불어 손맛으로 섬세하게 버무린 드로잉의 덕이 크리라.


여타의 여행기에 비해 흥미로운 점은 탄성을 자아내는 스케치만이 아니다. 프랑스발 기차를 타고 러시아, 몽골,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돌아오는 여정을 반추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반도 철도노선이 개통될 미래를 떠올리며 상상의 기차여행으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횡단선의 시발점이 될 새로운 중앙역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앞 부지에 그려보는 저자의 건축가적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수많은 공공건축물들을 다시 돌아보고 그 의미와 기능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일깨우고 사고를 다양하게 확장을 위해 여행을 떠나고 책을 읽는 것이라면, 이 여행기는 가볍지만 경박하지 않게 그 길로 안내한다.


<랍국지하철>, 김동현, 2011


얼마 전 북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 展은 기차멍을 즐기는 이들에게 꼭 소개하고픈 전시였다. 그중에서도 김동현 작가의 작품에는 전국의 기차 덕후들을 열광시킬 요소들이 가득했다.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기차 노선도와 자신의 상상 속 선로를 종이로 연결해 끝없이 작품을 이어가는데, '길이 왜 다 구불거려요?'라고 묻자 이렇게 화답했다.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이에요

전시회의 제목으로 거듭난 이 한마디는 자신과 동료 작가들의 창작하는 일상을 대변한다. 장애예술 혹은 아웃사이더 아트라고도 부르는 바깥세상의 레이블링 따위는 알아채지도 못한 채 묵묵히 자신만의 내면세계로  작가 22인. 초점 없이 멍하니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있다고 사회의 한 귀퉁이로 밀쳐진 이들의 마음속에는 이토록 놀랍고 창의적인 신대륙이 구비구비 펼쳐져 있던 것이다. 



한 분야를 파고드는 전문가와 덕후, 그리고 자폐성 장애인을 구분 짓는 기준은 뭘까? 또 얼마나 명확할까? 사회성과 소통능력의 차이가 각자의 인생 항로를 확연하게 비트는 모습에서 출발점은 같지만 선로 교차점에서 각기 동떨어진 방향으로 향하는 기차들의 뒷모습이 중첩된다. 김동현 작가의 작품 속 선로는 다행히 직사각형의 종이를 벗어나 새로운 지면에서 끝없이 이어진다. 네모난 상자 속에 상상력이 갇혀버린 자칭 일반인들의 획일화된 사회 규범. 그리고 이를 훌쩍 뛰어넘는 순수한 천재. 경쾌한 일탈 같은 그의 작품들 앞에서 숨통이 트인다.



자폐적이란 말은 흔히 부정적인 어감으로 쓰인다. 집단주의적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작은 종이를 연결하여 여럿이서 함께 덮을 만큼 커다란 이불 같은 지도를 만든다는 김동현 작가의 작품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세상과 소통할 줄 모른다고 비난하는 냉소적인 시선조차도 조금은 녹여낼 수 있는 새로운 세계의 언어가 아닐까 싶다.


김동현 작가의 인터뷰를 보며 '인간은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전체를 이루는 일부인 것을'로 시작하는 존 던의 시가 떠올랐다. 사람 좋아하는 개인주의자인 나는 언뜻 모순적으로 보이는 이 정의 속에 각자의 자율성을 존중받으면서도 하나의 공동체로서 느슨한 듯 질기게 연결될 비법이 숨어있다고 본다. 멀감치 떨어져 있어 보여도 실은 적절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선로로 이어진 기차역 같은 우리들. 때로는 지도 밖으로 뻗어나가 새로운 철로를 개척하는 수줍은 천재들도 우리 중 하나임을 잊지 말자. 실은 우리 중 가장 용감한 자 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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