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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일루아의 고양이 Jun 23. 2021

지도멍

인생 길치를 위한 지도 독해법

남편과 함께 종종 모르는 동네를 걷는다. 옆 마의 또 이웃 마을 정도의 거리감이 있는 동네가 주요 타깃. 유명 관광지가 아닌 평범한 동네 산책은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과 함께 뭔가 익숙한 신비감을 지녀 운동을 빙자한 호기심 충족 기행으로 제격이다. 늘 먹던 비빔국수의 마무리를 참기름이 아닌 들기름으로 슬쩍 바꾼 정도의 생경함이랄까? 갑자기 유우니 사막에 뚝 떨어진 듯한 오감의 충격 없이 그저 반복되는 일상 속 둔탁해진 감각을 간질거리는 정도의 가벼운 저녁 산책 루트다.


이런 초간단 동선에도 예습과 복습은 필수. 특히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쭈욱 들이키며 방금 거닐었던 동네 지도를 복기하는 의식은 때론 산책 그 자체의 즐거움을 압도한다. 구글맵과 다음 지도를 확대해가며 지도멍에 빠지는 시간은 우리 부부를 어린 시절 꼬마 탐험가의 말랑한 심장으로 다시 콩닥거리게 만든다. 주말 산행을 다녀오면 대한민국 전도를 펼쳐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종이 속 길목 여행을 떠나시던 아빠의 마음도 이런 설렘이 팔 할이었겠지. 취미도 유전이 되는 걸까 싶어 알싸한 맥주 한 모금이 그리움이 되어 목구멍을 타고 흐른다.


<진실과 신념의 지도>, 그레이슨 페리, 2011,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미술관 소장


지도(地圖)의 사전적 의미는 지구 표면의 상태를 일정한 비율로 줄여, 이를 약속된 기호로 평면에 나타낸 그림으로 정의된다. 줄인 비율약속된 기호란 부분이 먼저 쏙 들어온다. 내 머릿속 온갖 잡념의 흔적을 한 장의 지도로 나타낸다면 시각적으로나마 고뇌의 크기가 확 줄어든 느낌이 들겠지? 엉긴 스파게티 국수처럼 시끌벅적하게 뭉친 마음일지라도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선 미리 약속한 기호로 표현해야 하는구나, 라는 새삼스런 깨달음도 엄습한다.


평양 지도에 한 땀 한 땀 창문을 그려 넣고 있는 풀러 (사진 출처: BBC)


흔히 Pictorial Map이라 불리는 그림 지도에 본격적으로 빠지게 된 것은 영국의 드로잉 작가 풀러(Fuller)의 세계 도시 시리즈를 본 이후였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살았거나 방문한 적이 있는 장소들을 이십 년 가까이 그려왔는데, 도시의 정확한 비율이나 배치를 기반으로 한 기술적인 묘사가 아닌 자신이 그 도시에서 생활하며 느낀 감상을 지도의 형태로 표현해 왔다. 때문에 그의 작품을 인상주의 마인드맵이라 칭하기도 한다.


<자가격리 및 팬데믹 생존 지도>, 풀러, 2020, Fullermaps.com


자신이 나고 자란 영국 런던이나 브리스톨의 지도는 물론 우리에게는 2019년에 공개된 평양 지도로 더 잘 알려진 풀러는 모노톤의 지도를 내비게이션의 도구가 아닌 자신의 내적 갈등이나 장소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인드맵으로서의 지도 그리기 작업은 특히 베이징 체류 시기에 코로나가 발병하면서 자가격리를 해야 했던 경험의 충격으로 증폭되어 코로나 시대의 혼란과 불안을 담은 <자가격리 및 팬데믹 생존지도>라는 작품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한때 우주선을 닮은 평양의 기이한 아이스링크장에 매료되었던 작가가 그 모습을 똑 닮은 집을 그림 정중앙에 하나의 거대 모뉴먼트처럼 그려놓은 점에서 집콕의 시대가 되어버린 오늘을 실감케 된다.


<시간의 지도>, 그레이슨 페리, 2013,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 소장


열길 물속 같은 사람 마음을 한 장의 지도로 나타낼 수 있다면 사는 게 얼마나 명쾌할까?

그 오랜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국립중앙박물관의 <시대의 얼굴> 전에서 찾았다.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의 소장전답게 전시장을 가득 채운 초상화 중 가장 오랫동안 나를 붙들어놓은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인물화인 <시간의 지도>. 드로잉으로 먼저 접한 그레이슨 페리(Grayson Perry)의 작품이었다. 그는 고국 영국에서는 도예가이자 태피스트리 작가, 방송인 등으로 더 잘 알려진 르네상스형 예술가이기도 하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 예술활동을 펼치는 그답게 자화상 또한 반드시 자신의 얼굴을 그려야 한다는 전형을 깼다. 자신과 타자 간의 경계를 마치 중세 성곽 같은 모습의 벽면으로 구획 짓고,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이나 감정들을 말풍선처럼 그림 이곳저곳에 흩뿌려놓았다.


정체성이란 혼자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것.
스스로 만들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아의 본질이다.

초상화란 '나'와 '나를 보는 사람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라는 전시 설명처럼 정체성이란 무엇인지를 자신만의 언어로 정의한 그레이슨 페리. 마치 새로 구입한 가전제품의 매뉴얼을 꼼꼼히 읽어보듯, 그레이슨 페리 사용설명서로 거듭난 그의 지도를 차근차근 해독해본다.


작가가 지닌 너무나 부러운 재능: 일명 '개소리 탐지기(Bullshit Detector)'
이토록 빼어난 작가조차 늘 자기 자신이 가장 끔찍한 비평가라니, 어쩐지 안심
그레이슨 페리의 또 다른 자아인 아내 필리파


허풍쟁이들의 개소리는 단번에 파악하는 센서가 장착되어 있고, 자기 자신에게는 누구보다도 신랄한 역대 최악의 비평가이며, 세상사에 대해 무지와 무관심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그레이슨 페리의 복잡한 내면세계. 심리치료사이자 작가인 아내 필리파 페리(Philippa Perry)를 내면의 또 다른 자아로 그려 넣은 모습에선 유쾌한 낭만주의자의 풍모마저 느껴진다. 학력이나 가족사항 등 사회에서 가장 먼저 통용되는 프로필은 지도 한쪽 구석에 비고란으로 뭉뚱그려있어 작가가 스스로 정말 중요하게 여기는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돌아보게 해 준다.


오늘 밤 나만의 마음 지도를 그려보며 지도멍에 빠진다. 내 두터운 성벽 밖, 나의 열길 물속을 여전히 더듬거리는 타자들을 위한 사용설명서를 적어내려 본다. 나이지만 어쩐지 낯설기도 한 나의 세세한 마음결이 드러나는 신기한 경험. 행여 오작동 날까 하나하나 부지런히 적어보는 이 시간이 잔잔하고도 풍요롭다. 사랑하는 내 곁의 타자들. 그들의 촘촘한 사용설명서도 언젠가 정독할 날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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