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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일루아의 고양이 Jun 03. 2021

라디오멍

우연이 이끄는 선율의 세계 속으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요,라고 하면 흔히 클래식 음악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아침을 클래식 FM으로 시작한다고 하면 뭔가 상당히 현학적인 취향의 소유자로 오인받는다. 학창 시절에 배웠던 장/단조 정도 구분하고, 안단테와 알레그로가 뭔지 들어본 정도가 전부인 것을. 이 정도의 애호가라 마음 편하다. 그저 음악이 좋은 문외한이라 아무런 부담 없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을 경쾌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으니. 전문가라면 음악이 바뀔 때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절로 곡을 분석하며 듣게 될 것만 같다.



만년 클린이에게 라디오는 비발디의 사계를 넘어 음악의 깊숙한 동굴 속 이곳저곳 탐험케 하는 고마운 매체다. 오늘도 처음 들어보는 작곡가의 곡으로 점심시간을 맞이했다. 폴란드계 독일 작곡가인 필립 샤르벤카(Philipp Sharwenka)의 피아노를 위한 5개의 낭만적인 에피소드, 작품번호 65번 중 5번 소박하고 평온하게. '소박하고 평온하게'라니. 듣기도 전에 벌써 사르르 힐링되는 제목 아닌가? 라디오멍에 빠져 음악에 젖어든 3분여 동안은 딱 제목만큼의 온화한 충만감이 가득한 시간이었다. 잠깐 피안에 다녀온 듯, 갓 구운 폭신한 카스텔라 위 퐁 떨어진 기분으로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밤 10시가 되면 한층 재기 발랄한 라디오 친구가 찾아온다. 왁자지껄 여고시절 야자시간으로 돌아간 기분을 되돌려주는 푸른밤, 옥상달빛입니다. 조잘조잘 재잘재잘, 옆 짝꿍의 끝없는 만담이라도 듣는 듯 ㅋㅋㅋ을 이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시간 순삭. 벌써 자정이다. 풀 죽어 있을 때 힘내라는 말 대신 야야~~ 어깨 툭 치며 떡볶이 사 주는 절친 같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의 진정한 킥은 바로 선곡. '아니, 여태 이런 노래를 모르고 인생을 논했단 말이야?' 싶은 펄떡이는 곡들이 흘러나온다.


역시나 어젯밤 처음 들어 본 최백호뛰어. 1976년 데뷔 앨범에 수록된 곡을 재즈 음악가 말로와의 협연으로 파워풀하게 되살려낸 노래다. 리메이크곡조차 이미 9년 전에 나왔건만 내겐 너무도 생소한 곡이다. 그런데 기막히다. '전압에 차오른 목소리로 쏟아지는 빗 속을 뛰어보라고 권하는 노래'라는 어느 기자의 해석처럼 첫 소절부터 저 깊숙한 단전에서 들끓어 오르는 생명력이 폭발하는 노래다.


쏟아지는 빗속을 뛰어봐요

부딪히는 빗방울이 즐거워요

메말랐던 가슴들 비에 흠뻑 젖어봐요

뚜뚜루뚜 뚜루뚜 뚜뚜루뚜 뚜루뚜

사라져 버려라 슬픈 이야기

흩어져 버려라 뛰는 내 발길


이 곡은 시폰 커튼이 하늘하늘 휘날리는 북유럽풍 카페에 앉아 창 밖의 비를 그저 바라만 보는 날의 노래가 아니다. 낮술 한 잔 쭈욱 들이켜고, 우산도 없이 뛰쳐나가 온몸을 퍼붓는 장대비로 흠뻑 적시고픈 날을 위한 곡이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혹은 차오르는 분노든 내 안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기분이 들 때의 BGM. 이런 노래를 일흔 넘어 포효하듯 부를 수 있는 최백호라는 가객에게 전율하듯 이끌려 어느새 그의 노래를 하나하나 찾아 듣게 된 나. 조끼 입은 토끼를 따라 들어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뭔가 홀딱 홀린 기분이다. 넋 놓고 라디오멍을 때리다 비밀의 동굴을 발견한 셈이다.



단어 덕후인 내가 아끼며 야금야금 읽곤 하는 책, 단어의 사연들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모르는 단어는 내가 모르는 세계다.

음악의 세계도 마찬가지. 내가 모르는 노래 한 곡이 이만큼의 풍성한 신세계를 턱 하니 눈앞에 펼쳐준다. '하나의 단어를 붙잡으면, 하나의 우주가 걸려든다'는 이 책의 전언처럼, 오늘도 라디오를 통해 내 협소한 세계를 빼꼼히 열어 훈풍을 불어넣어 주는 뭉클한 신곡 하나를 전해 듣는다.


그렇게 또 한 세상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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