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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일루아의 고양이 Jul 30. 2021

영상멍

나도 선인장이 되고 싶은 날

서울은 완벽합니다. 모든 게 다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저까지 서울에 있을 필욘 없을 거 같습니다.


썸네일을 보고 이게 뭔? 하며 호기심에 클릭한 이번 생은 선인장. 알고 보니 펭수에 이어 EBS에서 야심 차게 준비한 새로운 캐릭터란다. 펭수가 부드러워 보여도 칼칼한 킥이 있는 청양마요소스과라면 103세의 혼살러 인장선 씨는 슴슴한 듯 어느새 한 그릇 스읍 비우게 하는 잣죽 같은 인물이다. 그런 무해한 저염의 맛이라 첫 화를 다 볼 때까지도 계속 시청할지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의 이 멘트에서 그만 가슴이 쿵. 모든 게 완벽한 서울을 떠나 2화부터 이어지는 제주도의 톤 다운된 바닷 풍경은 인내한 자에게 참가상처럼 주어지는 편안한 보상이다.


사진 출처: EBS


한 세기가 넘게 선인장으로 살아왔건만 여전히 오이와 무, 애호박 등으로 오인받곤 하는 인장선 씨. 본캐보다 더 잘 나가는 부캐 전성시대지만 오늘도 슴슴하디 슴슴한 우리의 장선 씨는 그저 본연의 모습인 선인장으로 봐줄 때가 가장 행복하다. 나이만 먹었지 뭐든 서툴고 어설픈 그에게 마음이 스며 건 실은 그와 별다르지 않은 내 모습이 비쳐서 일지도 모른다. 에어프라이어에 쥐포 두어 개 구워 꼬마 맥주 한 캔과 함께 인장선 씨의 밋밋한 듯 정겨운 제주살이를 보고 있노라면 하루의 노곤함이 잔잔한 밤 파도에 스르르 떠밀려간다.


사진 출처: EBS


무엇보다 서울을 떠나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맞이한다 해서 마법처럼 모든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짚어준 게 마음에 든다. 바람이 조금 더 달고 탁 트인 바다가 좀 더 시원할 뿐 우리의 인장선 씨는 여전히 외롭고 전에 없이 서툴다. 그의 어리바리함이 되려 증폭되는 타지 생활이지만 모두들 여유로운 저 바다 풍경만큼이나 한 호흡 천천히 그를 기다려준다.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하강하는 러시아 지하철의 에스컬레이터처럼 숨 막히게 돌아가는 도시 생활에서 발을 헛디딜 때의 아득함. 3배속이 아닌 자연의 느긋한 보폭에 맞춰 돌아가는 일상을 되찾을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장선 씨의, 또 우리의 발걸음이 늘 남쪽의 섬으로 향하는 이유는 아닐까? 한 회씩 아껴가며 영상멍에 빠질 때마다 제주 한달살이라도 하고 온 듯 보드라운 바닷바람이 나의 하루를 감싸주는 기분이 든다.  


사진출처: https://twitter.com/snoopy


이제까지 선인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캐릭터는 스누피의 형인 스파이크였다. 우리의 인장선 씨가 태어난 미국 애리조나와 주경계선을 맞대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어느 사막에서 홀로 살아가는 스파이크. 그리고 그에게 유일한 벗이 되어준 선인장. 스파이크의 혼잣말을 담아주고, 외출에서 돌아온 그의 모자를 받아주고, 크리스마스 때면 알록달록 색색의 줄 조명까지 걸어주는 묵묵한 친구 선인장. 담담하게 외로운 존재들끼리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지만 늘 선인장 가시만큼의 거리는 존중해주는 모습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팁 한 수를 또 배운다.


<선인장이 있는 풍경>, 디에고 리베라, 1931


특이한 모습 때문에 어딜 가나 주목받는 인장선 씨지만 선인장이 우리네 가을 벼이삭만큼이나 흔한 멕시코에서는 디에고 리베라의 그림에서처럼 사회의 주류로 살아간다. 어딘지 경직된 듯한 스파이크의 선인장과는 달리 팔 동작도 한결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멕시코의 선인장들. 슈퍼마켓에 가면 채소코너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 건강식품으로 사랑받고 있고, 사촌 격인 용설란으로는 데낄라도 만든다 하니 아웃사이더가 아닌 핵인싸의 삶을 살아가는 멕시코 선인장만의 경쾌한 몸놀림이 이해가 간다. 내 사람들 사이에 녹아든 그 편안한 즐거움에 나도 모르게 전염된다.


인장선 씨처럼 우리 모두에게도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나만의 자리란 존재한다. 혹여 학교나 직장, 또는 이런저런 모임에서 겉도는 느낌에 순간순간 외로워진다면 나만의 멕시코가 어디엔가 활기차게 살아있음을 잊지 말자. 그리고 조금만 발품과 마음품을 팔면 적당한 기후와 토질이 있는 곳에서 나만의 새로운 멕시코를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사실도.  



별거 없는 일상이지만 모든 게 '완벽한' 하루로 시작하는 각 에피소드의 제목들. 그 완벽함이란 홍천강물에서 다슬기 건지듯 별거 없는 시간 속에서 나름의 행복을 바지런히 건져 올린 이들에게 주어지는 고소한 행운 같다. 하루 일과를 보람차게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인장선 씨처럼 이런 소박한 소회를 남길 수 있다면 나름 행복한 하루가 아니었을까?


최악은 아니었으니까 즐거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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