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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일루아의 고양이 Jul 09. 2021

필사멍

쓰기멍으로 이어지는 무한 멍루프

책을 읽다가 두고두고 품고 싶은 문장을 발견하면 독서 앱을 켜고 스크랩을 한다. 그렇게 쌓인 스크랩이 1년 사이 벌써 5천 . 다독보다 정독이 오래 남듯 독서 앱의 편의성에 취해 이런저런 글귀들을 모두 저장하다 보니 정작 가슴에 남는 문장이 없었다. 마치 필카의 시대에는 24방의 사진이라는 한계치가 있어 셔터를 누르기 전에 남기고픈 장면을 엄선했던 것처럼, 디지털 시대의 편리함은 잠시 접고 필사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안 쓰는 근육은 비록 손가락일지라도 퇴화하는지 오랜만에 포스트잇 메모를 넘어선 긴 문장을 써 내려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필체도 마지막으로 맹렬히 필기를 하던 학창 시절의 그 느낌 그대로 멈춰있었다. 안 하던 아침 조깅을 하면 다음날 허벅지가 땅땅하게 당기듯 오른손 중지에는 굳은살도 배기고 어쩐지 어깻죽지까지 저린 느낌이었다. 고작 한 장 반을 겨우 채운 날의 일이다.


필사를 하면서 눈으로는 남기고픈 글귀에 집중을 하고, 손으로는 글자를 꾹꾹 눌러쓰는 감각에 몰입하다 보니 신기하게도 필사를 하는 행위와 그 순간 자체에 푹 빠져 있을 수 있었다. 가슴에 새겨두고픈 문장을 한 자 한 자 쓰다 보니 마음결마저 그 문장을 따라 맑고 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의 명문을 따라 쓰며 내 마음에도 변화가 일자 나의 이야기를 쓰고픈 간절함도 피어났다. 잠자리에 들기 전 그날의 감사 일기를 쓰게 되면서 하루를 차분히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도 갖게 되었다. 피곤한 일들로 점철된 하루 같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또 그만큼 감사할 순간도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불면증으로 뒤척이던 밤이 조금은 가벼워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이야기다.



식물 공부 모임을 하면서부터 무릎을 구부리거나 손을 뻗어 식물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 잦아졌다. 작은 것들에 한 번 눈이 가고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니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소소한 아름다움을 더 자주 발견다. 무엇이든 저 나름의 시간대와 빛나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마저도.

 

글쓰기도 식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행위와 닮아있다.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풀떼기를 외면하지 않고 잠시 멈춰 그만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일. 쓰기멍에 젖어들수록 바쁜 일과에 짓눌려 잊고 지냈던 내 마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용케 시멘트 틈 사이를 비집고 올라온 어느 꽃씨의 고군분투기처럼 깊숙한 내면의 이야기가 소곤소곤 전해지기 시작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마음에 돋보기를 들이대듯 감정 하나하나를 찬찬히 살펴보는 일이다. 뭉뚱그려 헐~ 하나로 퉁쳤던 감정들 글쓰기 시작한 후론 잡초에 이름을 되찾아주듯 섬세히 어루만지게 된다. 나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려보낼 뻔한 순간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이 시간이 그래서 귀하다. 글쓰기란 나를 아끼고 보듬는 가장 고요하고도 힘 있는 방법이 아닐까?  


<늘 흑백논리처럼 명확한 것은 아니지>, 카린 주릭, 2017


못 이룬 꿈을 한 입 맛보게 해주는 것 또한 글쓰기가 주는 선물 같다. 어문학을 전공하고 외국어로 밥벌이를 하고 있지만 한때 미대 진학을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문자언어가 아닌 조형언어로 나를 표현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것에 끌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직업으로 삼아보니, 취미가 업이 되는 순간 아마추어의 순수한 마음으로 내가 아끼는 것들을 마냥 좋아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내 마음이 늘 향해있던 미술만큼은 애호가의 영역으로 남겨놓았기에 아직까지 열정이 남아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글을 쓰면서부터 전시회를 다녀오면 작품에서 받은 농밀한 여운을 일상의 경험과 엮어 이야기로 풀어가고 있다. 미술비평가의 분석적인 시각이 아닌 예술이 있어 매일매일이 입체적으로 올록볼록해진 한 애호가의 설레는 시선. 직업을 바꾸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에 대해 실컷 이야기하고 아름다움에 살랑거리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글쓰기가 주는 넉넉하고 풍성한 즐거움이다.


<무제>, 알렉시스 레로, 2013


단어 덕후인 나에게 글쓰기는 일상에서 접하기 힘든 맛깔난 단어들을 원 없이 써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부터 사전바라기였던지라 얇은 습자지 같은 페이지를 사각사각 넘기는 소리와 까슬까슬한 종이의 촉감, 그리고 쿰쿰한 잉크 내음까지도 애틋하다. 종이 사전의 두툼한 매력은 인터넷 사전의 비교 불가한 편리함에도 늘 그리운 존재이다. 사전을 아무 데나 펼쳐 처음 보는 단어들을 소리 내 읽어보고, 같은 듯 조금씩 다른 정의 1, 2, 3번을 읽어보며 그 미묘한 차이를 의아해하는 사전멍은 여전히 즐겨한다. 때로는 평소 쓰고 싶어 안달 났던 의성어나 의태어를 종종 PPL처럼 글 여기저기에 심어놓는 재미로 끄적이곤 한다.  어감이 혀에 착착 감기는 느낌이 신비롭고 생경해서 좀체 끊을 수 없는 취미다. 글쓰기는 뭐니 뭐니 해도 쓰는 내가 재밌어야 오래오래 쓰는 법이니까.


작가 김연수는 소설가의 일에서 일흔 살이 넘어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외숙모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양화를 그리려 간 문화센터에서 우연히 시 창작 수업을 신청하고 이내 시에 푹 빠진 칠순의 외숙모. 사랑에 깊이 함몰된 이들이 그렇듯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며 휘몰아치는 열정으로 시를 써 내려간 그녀는 결국 시집까지 펴낸 어엿한 시인이 되었다.


외숙모는 스스로 시를 발견한 것이다.
다른 대부분의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이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는 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김연수 작가는 자신에게 시인의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좋은 시를 쓰는 것인지 아닌지 따위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은 채 일단 매일 몇 편씩 시를 써 내려갔다고 한다. 김천역 앞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며 매일같이 정성껏 팥을 쑤어 단팥죽과 팥빙수를 만들던 어머니의 삶. 하루도 빠짐없이 일하는 어머니와 이웃들의 삶을 지켜보며 그들의 일하는 일상은 근면 성실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로 일출처럼 당연한 일이라 했다. 그리고 그가 매일같이 시를 꾸준히 쓸 수 있었던 것은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어떤 희망이나 두려움도 없이. 마치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 살아온 덕분이라고.


소소한 내면 탐험기 같은 글일지라도 마음처럼 써내려 가지지 않을 때면 김천역 앞을 새벽부터 일출처럼 환하게 밝히는 이들을 떠올려본다. 이웃 작가님의 800개가 넘는 글들이 쌓여간 하루하루를 헤아려본다. 글쓰기가 괴롭다고 머리를 부여잡고 자꾸만 냉장고 앞이나 티브이 리모컨으로 향하게 될 때 김연수 작가의 이 문장을 다시금 곱씹어본다. 작가가 되지 않더라도 나날이 새로운 사람으로는 거듭나고 싶기에.


매일 글을 쓴다.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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