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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일루아의 고양이 Feb 15. 2019

크루즈 한달살기도 짧은 사람들

[유목민의 여행법 #7] 크루즈에서 만난 또 다른 섬 같은 인연들

                                                                                                

모든 인간은 섬이다.
하지만 그 섬과 섬은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다.



제각기 동떨어진 하나의 섬처럼 외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 맺음에 대해 다룬 영화 '어바웃 어 보이(About a Boy)'는 크루즈 한달살기를 꿈꾸던 나에게 잔잔히 스며든 영화다. 한 달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단순히 기항지의 색다른 풍경과 현란한 크루즈 시설에만 감탄하고 오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다녔던 여행의 추억들을 곱씹어보니 마음에 오래도록 각인된 기억은 대체로 두 가지; 가슴이 아려올 정도로 장엄한 자연 풍광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 사람들과의 조우였다. 결심이 섰다. 크루즈 한달살기를 하는 동안 이 두 가지 화두에 집중하기로. 또 다른 미지의 섬들도 찾아 나서 보기로.


크루즈에서 한 달 동안 머물 거라며?
그렇담 9개월 차 대선배님을 소개해줄게!

리처드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늘 앉는 자리라며 필리핀에서 온 승무원 랜디가 귀띔해 준 4층 데크로 향하니 선베드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고 계신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잠시 소개가 오가고 본격적인 질문 타임. 어쩌다 9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크루즈 여행을 이어가고 계신지가 너무도 궁금했다.


지난 40년간 변호사로 일하면서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어. 애들은 어느새 훌쩍 커서 제 갈 길 다 가버리고 혼자 덩그러니 네브래스카의 집 현관 의자에 앉아 있자니 갑자기 나도 떠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출장 말고 진짜 여행으로.
그래서 그 길로 짐 챙겨 나왔지!


놀라운 건 이번 여행은 이제 9개월째 접어들었지만, 은퇴 후 꾸준히 장기 크루즈 여행을 다니면서 일 년에 한두 번씩 크리스마스나 집안 경조사가 있을 때만 잠깐 집에 들른다는 점이었다. 여행 기간 동안 집은 장기 임대를 놓으니 그 월세로 크루즈 비용도 충당되다고 했다. 크루즈선에서 장기 체류를 하게 되자 할인율도 대폭 높아지고 무료 세탁권 등 각종 혜택도 받았다고 슬쩍 알려주신다. 그리곤 덧붙이시는 한 마디.


난 로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그 냥반은 집까지 팔고 지금 3년째 이 배에서 유랑 중이라고!

아무래도 나의 노후 계획은 전면 수정에 들어가야겠다.

고급 실버타운으로 둔갑한 요양원이여 안녕.

난 크루즈로 간다!





크루즈에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높은 연령층의 승객들도 많지만 젊은 커플이나 가족, 혼여족들도 종종 포착된다. 특히 뉴욕에서 출항하는 크루즈선에서는 세상 시크한 표정의 혼여족 여성들이 여느 때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58만 원이면 일주일 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연 보여주며 카리브해 연안의 열대 섬들까지 구경시켜주니 내가 뉴요커라도 마다할 리없는 꿀여행일 것이다. 아침마다 최후의 만찬 인양 조식 뷔페 접시에 삼층 석탑을 쌓아 올린 나와는 달리 그녀들은 곡물 얹은 요거트나 간단한 샐러드가 끝. 배부른 돼지 쪽을 즐겁게 택하는 건 언제나 나였다.


크루즈에서 만난 잊히지 않는 가족으로는 미국 서부 오레건주 숲 속에서 살다 온 존 아저씨네가 있다. 우리나라 풍토로도 다 큰 성인 아들 둘을 데리고 한 달 넘게 크루즈의 좁은 선실 안에서 여행하기가 쉽지 않은 터. 하물며 일찍이 제 갈 길 찾아 독립하는 문화를 가진 미국에서 대학생 아들 둘과 크루즈 한달살기라니 놀랍다 못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존 아저씨는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 방학 동안 가족 여행을 떠나는 건 아들들이 코흘리개였을 때부터 다져온 오랜 전통이라 다 커서도 별 반항 없이 자연스럽게 함께한다고 했다. 부인인 리사도 이때만큼은 장기 휴가를 받아서 동행하는 구도로. 그렇다고 여행 내내 아들들과 꼭 붙어 다니는 건 아니고 각자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헤쳐 모여’ 식으로 다녀온 뒤 저녁식사 테이블에서 그날의 모험담을 서로 나눈다고 했다.


사진을 전공한 큰 아들 숀은 자꾸 리사 아줌마가 나와 맺어주려 해서 속으론 배시시 웃으면서도 못내 당황스러웠다. 띠동갑인 큰누나 뻘로서 일말의 양심이랄까? 막내 폴은 여느 집 막내답게 밝고 붙임성 있고 사랑스러운 청년. 여행 도중 인도 고아(Goa)에서 봉사활동 중인 친구를 돕고 온다며 훌쩍 떠났다가 싱가포르에서 재승선한 그와 재회하니 진짜 집 나간 꼬맹이 막내 동생이라도 돌아온 듯 어찌나 반갑던지! 지금도 이들과 함께 한밤중 크루즈선 야외 데크에서 검푸른 밤바다 바라보며 와인 한 모금, 별 헤아리며 또 한 모금, 알싸한 바닷바람 맞으며 자분자분 나누던 이야기들이 그리워지곤 한다.



해마다 1월 1일 정초가 되면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온다. 8년 전 크루즈에서 함께 한 고든 아저씨가 보내는 따스한 신년 인사. 밥상에서 주고받은 여행용 명함이 맺어준 자그마한 인연이 이 기나긴 시간 동안 이어져왔다. 매서운 스코틀랜드의 바닷바람도 아랑곳 않고 신나게 산책 중인 두 견공 맥과 두글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다시금 크루즈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될 고든 아저씨네와의 재회도 고대해본다.


크루즈 여행에서 연결된 나의 작은 섬들아. 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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