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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일루아의 고양이 Mar 04. 2019

크루즈 대학에 다닌답니다

[유목민의 여행법 #9] 내가 비주류 크루즈와 사랑에 빠진 이유


크루즈 여행에 막 눈을 뜬 입문기에는 카니발 크루즈(Carnival Cruise Line)나 로얄 캐리비안 크루즈(Royal Caribbean International)와 같은 대중적인 크루즈 선사를 주로 애용했었다. 아이들의 로망인 디즈니 크루즈(Disney Cruise Line)와 함께 세계 3대 가족용 크루즈 선사로 손꼽히는 이들은 쉽게 말해 백화점이나 대형몰 같은 개념의 크루즈이다. 웅장하고 압도적인 스케일의 인테리어, 친근하고 대중적인 식단, 화려한 라인업의 공연 프로그램과 최신식 엔터테인먼트 시설 등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뷔페 레스토랑처럼 불특정 다수의 고객을 위해 다양한 즐길거리를 마련해놓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크루즈 여행의 정석'에 가까운 여행이기에 인생 첫 크루즈 여행을 떠나는 지인들에게는 이들 선사의 크루즈부터 시작하도록 추천하곤 한다.  


하지만 가짓수가 많은 뷔페식을 연이어 먹다 보면 한 가지라도 진짜 맛깔나게 잘하는 일품 요릿집이나 가정식 백반집이 그리워지듯, 이들 선사의 다소 정형화된 크루즈 여행 패턴에 식상해질 무렵 중소형 크루즈 선사들의 틈새 프로그램에 대해 알게 되었다. 마치 똑같은 프랜차이즈 브랜드만 입점해있는 대형몰에서 쇼핑을 하다가 북촌의 미로 같은 뒷골목에서 우연히 발견한 작은 공방의 수공예품처럼 맞춤형 여행을 선사하는 크루즈. 보다 깊이 있는 여행으로 이끄는 이런 크루즈야말로 '한달살기' 여행처럼 크루즈선에서 장기 체류를 하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알찬 신세계이다. 아직도 가격이나 일정이 맞을 때에는 대중적인 선사의 크루즈에 오르지만, 내 마음속 1순위는 이미 감칠맛 나게 혀 돌기에 착착 감기는 이런 비주류 크루즈에 빼앗긴 지 오래다.


물자가 귀한 곳에서 온 한 강연자는 침대 시트에 아프리카 지도를 그려오는 열정으로 승객들을 감동시켰다.


어학연수 대신 크루즈 여행을 가지 그래?

학교나 직장을 잠시 뒤로 하고 영어의 고수로 환골탈태하기 위해 홀연히 어학연수를 떠나려는 이들에게 이런 멘트를 날리면 열이면 열 '이 무슨 생뚱맞은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한다. 하지만 학교 때 집중적으로 배우던 문법이 아닌 일상에서 바로 쓸 수 있는 생활 영어를 연마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크루즈 여행만큼 생생한 수업 현장이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 부끄러움을 잠시 접고 조금만 손을 뻗으면 나와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원어민 영어 선생님들이 상시 대기 중이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홀딱 반했던 '강연 크루즈'는 바다 위를 떠다니는 TED 강연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나의 뇌세포와 감성 세포 모두를 일깨우는 크루즈 여행이었다. 외국어 익히기의 기본 철칙은 무조건 많이 듣기! 일단 귀가 트여야 입도 열리고 종국에는 내 생각을 조금씩 글로도 표현하게 되는 터. 이런 강의형 크루즈는 다채롭고 흥미로운 주제를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기 때문에 미국 드라마 '프렌즈(Friends)' 완파하기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영어 듣기 훈련을 하고픈 이들에게 권하고 있다. 또한, 여행 일정 동안 함께하는 강사들이나 동료 승객들과 가볍게 토론도 할 수 있어 보다 입체적인 영어 공부가 가능하다는 사실.


해양 생물학, 의학, 지리학, 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들이 일생 동안 치열하게 공부한 내용을 그 분야의 문외한인 승객들도 쉽게 소화할 수 있도록 한입 크기로 세심하게 재단해 알려주는 강의라 그런지 의외로 지루할 틈 없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때문에 그동안 전혀 관심이 없던 분야라도 강의를 듣고 난 후에 새롭게 흥미를 느껴 귀국해서도 그 분야에 대한 책을 찾아보게 될 정도로 나에게는 여행 이후의 울림도 꽤나 큰 경험이었다.


영국 BBC 방송국의 인기 앤티크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고(故) 데이비드 바비의 너털웃음이 문득 그리워진다.


지금은 작고한 영국의 유명 앤티크 전문가 데이비드 바비(David Barby)의 강연은 같은 크루즈를 바로 다음 해에도 또 탑승해 들을 정도로 푹 빠진 명강의였다. 두 번째 크루즈에서는 마치 우리나라의 골동품 감정 프로그램인 'TV쇼 진품명품'처럼 집에서 작은 앤티크 제품을 가져오면 강연 시간 중에 감정해주는 코너도 있어서 짐을 싸며 외할머니가 남겨주신 경대 서랍 칸칸을 열어보며 뭘 가져갈까 혼자 심각하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대부분은 주말 동네 벼룩시장에 내놓아야 겨우 팔릴까 말까 한 소품들임에도 어찌나 진지하고도 유머러스하게 감정을 해주는지 명치끝이 당겨올 정도로 웃었던 그날의 감정 현장. 영국 BBC 방송국의 앤티크 프로그램을 세 개나 진행하고 영국 드라마에도 카메오로 출연할 정도로 앤티크계의 슈퍼스타인 그이지만, 인간미 넘치고 소탈하며 무엇보다도 배꼽 빠지게 웃겼던 그의 현란한 유머를 오래도록 추억하게 될 듯하다. 팬이라고 수줍게 고백하자 더욱 쑥스러운 듯 볼 발그레해지던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의 따뜻한 그 모습. 내내 그리워할 순간이다.


강의형 크루즈는 마치 대학 시절 특강처럼 강연자의 상세한 이력과 함께 강의 일정표도 제공한다.


세계적인 천문학자 이안 모리슨(Ian Morison)과 함께 밤 10시가 되면 따끈한 홍차 한 잔을 들고 포근한 극세사 점퍼를 걸친 채 크루즈 맨 꼭대기 야외 데크에서 밤하늘의 별들을 보며 산책하던 날들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자신의 이름으로 명명된 소행성이 있을 정도로 천문학계에서 명성이 높은 석학인 그는 사진에도 조예가 깊어서 강연 일정에 특별히 '크루즈 여행 사진을 잘 찍는 법'에 대해서도 알기 쉽게 다뤄주었다. 그와 함께 흑연같이 깜깜한 하늘의 별을 헤던 크루즈 밤 기행의 추억은 그 밤하늘에 콕콕 박혀 빛나던 별들만큼이나 소중하다.


요리형 크루즈에서는 유명 레스토랑 출신 셰프들이 맛난 밥상과 함께 요리 강습도 책임진다.(출처: windstarcruises.com)


틈새시장을 겨냥한 비주류 테마 크루즈의 종류에는 강연 크루즈처럼 진지하게 공부를 하는 프로그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최근 몇 년 사이 신개념 요리 프로그램과 쿡방이 유행하듯 크루즈도 이제는 '요리/미식 크루즈(Culinary Cruise)'가 대세. 유명 레스토랑이나 요리 경연 쇼 출신 셰프나 요리책 저자 등과 연계한 이들 크루즈는 저명한 셰프의 요리로 승객들의 삼시 세 끼를 책임지고 크루즈 내에서 요리 강습도 펼칠 뿐만 아니라 유명 와이너리를 방문해서 와인과 요리를 페어링 하는 법을 알려주는 일정을 넣는 등 특화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대중적인 크루즈들은 시설은 화려하지만 전반적으로 음식 수준이 평이하기에 미식에 초점을 맞춘 이런 요리 크루즈가 최근 들어 큰 각광을 받고 있다.


[요리/미식 크루즈]

요리쇼: https://www.hollandamerica.com/en_US/onboard-activities/cruise-activities/americas-test-kitchen.html

미식 기행: https://www.windstarcruises.com/cruise/themed-cruises/james-beard-foundation-west-coast-epicurean-extravaganza/?id=499&sid=3022


건강에 초점을 맞춘 크루즈선에 오르면 여느 크루즈 여행처럼 한겨울의 고양이마냥 뚠뚠 해져서 돌아올 확률이 줄어든다.(출처: runningcruise.com)


그런가 하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크루즈 여행을 한다면 콕 집어 선택할 만한 프로그램도 있다. 일명 '달리기 크루즈(Running Cruise)'. 아마추어 마라토너인 그에게는 몸풀기 정도의 코스일 수도 있지만, 작년에는 하와이 제도의 섬들을 돌며 마우이 섬에서 하프 마라톤 뛰기, 킬라우에아 이키 분화구 및 트레일 달리기 등 장엄한 자연에서 맘껏 달릴 수 있는 근사한 프로그램을 제공해서 찬사를 받았다. 올해는 알래스카의 빙하에서 달리는 가슴 벅찬 일정이라니 동네 뒷산 하이킹 정도가 체력의 한계인 나조차도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뛰는 건 고돼서 사양하지만 보다 정적인 방법으로 전인적인 힐링을 하고픈 이들에게는 '건강/웰니스 크루즈(Wellness Cruise)'를 추천. 요가, 필라테스, 태극권과 지압 강좌는 물론 식품 영양학 전문가의 지휘 아래 건강하게 체중 조절을 할 수 있는 다이어트 식단이 제공된다. 스파와 명상, 심리 치료 세션까지 동반된 프로그램도 있어 전방위적으로 몸과 마음을 고루 쉬고 돌아오는 건강한 크루즈 여행이 될 것이다.


[건강/웰니스 크루즈]

달리기: https://www.runningcruise.com

웰니스: https://www.seabourn.com/en_US/experience/spa-and-wellness.html


스웨그 넘치는 크루즈 여행의 끝판왕을 경험하고 싶다면 대서양을 횡단하며 패션쇼를 감상하는 패션 크루즈를 추천!(출처: cunard.com)


화려한 크루즈 프로그램을 찾는다면 '패션 크루즈(Fashion Cruise)'나 '댄스 크루즈(Dance Cruise)'에 몸을 맡겨보자. 뉴욕에서 출발하여 대서양을 가로질러 영국 사우스햄턴에 도착하는 일정 동안 유명 디자이너의 선상 패션쇼와 함께 패션 전문가들의 강연과 파티까지 풀 패키지로 즐길 수 있다. 몸 안에 두둠칫 두둠칫 리듬을 내장한 춤꾼 타입에게는 열대의 낙원 같은 섬들을 돌며 강렬한 비트에 땀범벅이 되도록 춤을 출 수 있는 카리브해 라틴댄스 크루즈EDM 크루즈를 강추! 보다 고전적이고 섬세한 춤을 선호하는 이들을 위한 발레 크루즈도 준비되어 있어 고르는 재미가 쏠쏠하다.


비주류 크루즈에는 온갖 덕후들을 위한 크루즈 프로그램도 있다. 미국과 영국의 유명 TV 프로그램의 캐릭터들처럼 분장을 하고 실제 출연진들과 여행을 함께하는 '워킹 데드(Walking Dead)' 좀비 크루즈, '스타 트렉(Star Trek)' 크루즈, '닥터 후(Doctor Who)' 크루즈는 물론 프로 레슬링 야구 크루즈 등 깊이 파고들수록 놀라움의 연속인 비주류 테마 크루즈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패션/댄스 크루즈]

패션: https://www.cunard.com/en-gb/cruise-types/event-cruises/transatlantic-fashion-week

라틴댄스: https://www.sundancercruises.net/2019-dance-cruise

EDM: https://holyship.com/

발레: https://www.silversea.com/ballet-cruises.html


[덕후 크루즈]

워킹데드: http://www.walkerstalkercruise.com/

스타트렉: https://www.startrekthecruise.com/

프로 레슬링: http://www.chrisjerichocruise.com/





세상은 넓고 크루즈는 많다!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기존의 크루즈 여행이 망설여진다면, 다가오는 휴가에는 비주류 테마 크루즈의 세계로 빠져보자.


내 성향에 찰떡같이 맞는 프로그램과 나와 취향 궁합이 최적화된 승객들과 함께하는 크루즈이기에 그만큼 잔향이 오래 남는 여행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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