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의 여행법 #10] 잔고에게 덜 미안한 크루즈 여행
11년째 크루즈 여행을 이어오다 보니 주변에서는 내 지갑이 상당히 두툼한 줄 안다. 숨겨둔 로또 자금이 있는 것도 아니요, 시간 부자가 되기 위해 프리랜서로 전향한 지금은 더욱 알뜰한 살림 규모를 유지해야 하는 나인 것을. 그럼에도 내가 여전히 크루즈 앓이를 이어갈 수 있는 비결은 뭘까? 생각보다 싼, 아니 생각보다 엄청 싼 크루즈 가격에 있다. 친구들에게 '나 40일 크루즈를 82% 세일해서 150만 원에 다녀왔어.' 하면 '뭐? 진짜?? 말도 안 돼!!!'가 복붙복 반응. 어지간한 동남아 한달살기 비용보다 저렴하다니 다들 화들짝 놀랄 수밖에.
물론 크루즈 상품도 정가로 구매하면 비싸다. 하지만 잘 찾아보면 80%에 육박하는 할인율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 크루즈 상품의 수익 구조는 선실 판매만큼이나 승객들이 마시는 주류, 현지 관광 패키지 상품(Excursion) 또는 스파나 카지노 등 부대시설 이용료 등에 의존한다고 한다. 때문에 최대 6천 여명까지 수용 가능한 크루즈선의 절반을 비워가느니 할인가에 한 명의 승객이라도 더 태워 추후 그들이 크루즈 안에서 사용하는 추가 비용으로 충당하는 방안을 택한 것. 이런 배경을 잘 이해하면 저렴한 가격에 로망의 크루즈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나 무슨 크루즈 탈까?
오랜만에 조금 넉넉하게 잡은 휴가.
이번엔 뭔가 색다른 휴양을 즐기고픈 지인들이 대동 단결하여 묻는 질문이다.
하여, 이참에 십인십색 다양한 취향에 맞는 5가지 크루즈 상품을 콕 집어 골라보았다.
내측 또는 오션뷰 선실(2인 1실) 1인당 가격
(2019.3.13 환율 및 판매상품 기준)
기간: 7박 8일
가격: 약 56만 원~(혼여족이라면 싱글 추가 요금이 없는 상품으로 검색해보자)
크루즈 선사 & 등급: 노르웨지안(Norwegian)/5성급(16만 톤급)
기항지: 미국 뉴욕/플로리다 & 바하마 나소/그레이트 스트럽 케이
내가 본 뉴욕 풍경 중 단연 탑으로 꼽는 장면은 바로 맨해튼항에서 떠나는 크루즈선에서 바라보던 야경이다.
어둠이 어슴푸레 깔리는 석양 녁. 누군가 도시 전체를 밝히는 스위치를 켠 듯 순간 화려해지는 뉴욕의 마천루를 두고 떠나던 마음이 아득하다. 성급한 감탄사를 내뱉기보단 모두가 숨 죽인 채 먹먹히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던 그날 밤. 해묵은 추억을 은은하게 비추는 힘이 있던 야경이었다. 뉴욕에는 페리호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이나 브루클린 브리지를 눈에 담을 수 있는 방법이 제법 여러 가지. 하지만 반 자른 크로와상의 결처럼 겹겹이 섬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그날 밤 크루즈에서와 같은 야경은 그 이전에도, 이후로도 경험한 적이 없다.
뉴욕을 떠나 플로리다를 거쳐 아침에 눈 뜬 후 처음 맞이한 물빛이 바로 이 사진이다. 에메랄드빛, 비췻빛 그 어떤 빛나는 보석명으로도 오롯이 담아내지 못할 눈이 시린 이 물빛. 전날까지 나를 짓누르던 상념일랑은 단번에 씻어 내릴 맑디 맑은 바닷빛이다. 바하마 나소항에 내려 1달러짜리 시내버스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달리다 보면 세상 시름 같은 건 어느새 사르르. 가뿐한 마음으로 크루즈선에 다시 오르는 나를 맞이할 수 있다.
기간: 7박 8일
가격: 약 45만 원~
크루즈 선사 & 등급: 코스타(Costa)/4.5성급(9만 톤급)
기항지: 이탈리아 베니스/바리 & 그리스 코르푸/아테네 & 몬테네그로 코토르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이제 막 달아오른 연인들이 가기에 지중해만큼 로맨틱한 곳이 또 있을까? 낭만적인 운하의 도시 베니스를 거쳐 야자수가 즐비한 해안도시 바리에 이르면 어느새 광합성을 가득 한 몸에서 뜨끈한 햇볕 내음이 난다. 영화 <맘마미아>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그리스 코르푸섬에 다다를 때쯤이면 내 영혼의 지중해화(化)가 절정에. 꽃 하나 구름 한 점 예사롭게 지나치지 못할 정도로 오감이 파릇파릇 되살아남을 느낀다. 무엇을 먹어도 맛있게 느껴지는 건 단지 올리브유가 싱싱한 지역이라서가 아니다. 나 자신 또한 이 기막힌 날씨 따라 만발하듯 피어났기 때문. 흑백텔레비전을 보다 처음 컬러를 접했을 때의 충격만큼이나 온 세상이 총천연색이다.
몬테네그로 코토르부터는 유럽 고도의 멋이 되살아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된 이 곳은 그리스 코르푸의 구시가지보다도 한층 고풍스러운 멋이 느껴진다. 꼬부랑 산길이 많기로 유명한 몬테네그로인지라 크루즈로 편안하게 코토르에 이를 수 있다는 건 실로 행운! <꽃보다 누나>의 촬영지로 우리나라 관광객의 성지로 급부상한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 이를 무렵이면 7박 8일 일정이 꿈결같이 짧다. 그리곤 이내 아쉬움에 다시 올 그날을 성급히 손꼽아 보게 된다.
기간: 10박 11일
가격: 약 60만 원~
크루즈 선사 & 등급: 셀레브리티(Celebrity)/5.5성급(12만 톤급)
기항지: 미국 하와이(호놀룰루/힐로/코나/라하이나) & 캐나다 밴쿠버
하와이는 은퇴 후 추운 겨울이면 피한 여행을 떠날 열대 낙원으로 일찌감치 낙점한 곳이다. 지난 몇 년간 한달살기도 여러 번 이어왔을 정도로 애정하는 체류지. 물가가 비싸다는 점 빼놓고는 뭐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목적지다. 탁 트인 바다만큼이나 웅장한 산세와 열대 우림. 등 따시게 따사로운 햇볕임에도 동남아처럼 습하지 않아 쾌적한 산책길. 미국 땅이지만 동양인의 비중이 현저히 높아 인종차별의 꺼림칙한 기운 없이 마음 편히 활보할 수 있는 분위기. 느긋하고 소박한 현지 정서까지. 내가 지상낙원을 직접 설계한다면 이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 싶게 삼박자 사박자가 척척 맞는 곳이 아니던가.
세련된 도시의 스카이라인보다는 자연의 넉넉한 품 안을 더욱 그리워할 부모님을 위해 하와이 크루즈는 더없이 좋은 선택. 현지 관광에 나서도 입맛에 맞는 현지식이나 한식당을 쉽게 찾을 수 있어 부모님의 가려운 곳을 세심하게 긁어드릴 수 있다. 비행기로 하와이의 주요 섬들을 돌기에는 쉽게 지칠 연세이시라 편안한 크루즈로 하와이 제도를 유람시켜 드리는 것이 현명한 선택. 보너스로 여행의 말미에는 캐나다 밴쿠버의 전혀 다른 바닷가 분위기까지 선사해드릴 수 있다. 그야말로 종합 선물세트 같은 효도여행이 아닐까?
기간: 7박 8일
가격: 약 78만 원~
크루즈 선사 & 등급: 로얄 캐리비안(Royal Caribbean)/5성급(16만 톤급)
기항지: 호주 시드니/브리즈번 & 뉴칼레도니아 & 바누아투
호주와 뉴질랜드를 포함한 오세아니아 지역 크루즈는 타 지역보다 할인율이 낮다. 하지만 언젠가 이 지역에 흩뿌려진 보석 같은 섬들을 돌아보고 싶다면 크루즈 여행만큼 저렴한 여행법도 없지 싶다. 코알라와 캥거루의 고향 호주는 아이들에게 언제나 인기 만점인 여행지. 호주의 동물원은 직접 동물들을 접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많아 아이들이 특히 열광하는 곳. 직접 먹이를 주며 동물들과 사진 찍은 추억은 여행 후에도 신나게 자랑하고픈 소중한 순간이 될 것이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로 순식간에 국민 신혼여행지로 떠오른 뉴칼레도니아는 아직까지는 가 본 사람보다 가보고 싶어 하는 이가 더 많은 곳.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직항이 없어 접하기 힘든 바누아투는 특히 크루즈 여행으로 갈 때 그 진가가 발휘된다. 바다색이 청명한 섬들은 크루즈선으로 해안선에 다다를 때의 그 빛깔이 한결 미려하기 때문. 짙푸른 깊은 바다 빛을 바라보다 속살 고운 모래색까지 투명하게 비추는 해안가에 이르는 여정이 긴 여운을 남긴다.
기간: 18박 19일
가격: 약 58만 원~
크루즈 선사 & 등급: 코스타(Costa)/4.5성급(11만 톤급)
기항지: 이탈리아 사보나 & 프랑스 마르세이유 & 스페인 바르셀로나 & 카나리아 제도 & 브라질 헤시피/마세이오/살바도르/리오 데 자네이루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한 달이라는 자유시간이 툭 떨어지면 곧바로 크루즈 사이트 검색에 들어간다. 한 곳에 머물며 느그작거리는 한달살기도 좋아하지만 크루즈 여행을 결합한 짬짜면 같은 한달살기의 매력에도 눈 떴기 때문. 보통 크루즈 출발지와 도착지의 도시에서 짧으면 사나흘, 길게는 일주일까지 머물며 그 동네 탐방도 하게끔 루트를 짠다. 30일이란 시간 동안 20일 정도는 크루즈 여행을, 나머지 열흘은 여행의 시작점과 종료지점에서 살아보는 일정으로. 어렵게 다다른 낯선 도시에서 그저 크루즈선에 오르내리며 끝내기엔 아쉬움이 남기에 그렇다.
장기간 여행을 떠나는 이에게는 대서양 횡단 크루즈를 종종 권한다. 어떤 기항지에도 내리지 않고 오롯이 배 안에서만 생활하는 닷새 간의 기간이 내게는 늘 여유로운 호흡을 되찾아주었기 때문.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바다만 바라보기에도 이만한 시간이 없다. 가만히 있으면 몸이 근질거리는 타입도 크루즈선의 다양한 시설을 충분히 즐기기에 최적의 닷새. 성향이 다른 친구와 크루즈 여행을 가면 삼시세끼 밥때에만 만나도 된다. 각자 하고픈 걸 하고, 하고 싶지 않은 건 안 해도 될 자유가 주어지기에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도 사소한 걸로 티격태격할 일이 확 줄어든다.
중세의 모습을 아기자기하게 간직한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 사보나를 떠나 프랑스 남부 해안과 스페인 바르셀로나, 쉽사리 내딛기 힘든 카나리아 제도까지 여유롭게 돌아보면 어느덧 망망대해. 적막하던 대서양의 끝에는 내리쬐는 태양만큼이나 강렬할 색깔로 휘감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기다리고 있다. 중남미에서는 불현듯 적나라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무엇이든 여과 없이 쨍쨍하게. 날 서도록 선명하게. 무언가 속이 뻥 뚫리는 쾌감이 있는 곳이다. 껍질을 벗어던진 원초적인 날 것의 나도 격하게 반겨주는 그곳. 그 작렬하는 생동감이 그립다.
크루즈 여행은 주머니 두둑한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되려 세상 유람을 조금은 색다른 방법과 시선으로 하고픈 이들의 여행에 가깝다.
해안가를 기웃거리는 호기심 많은 바다표범처럼
짙푸른 바다에서 저 너머 육지의 세계를 바라보는 이들이 늘어나면 좋겠다.
첫 기항지에 다다를 때 그 울렁거리던 환희를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