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일루아의 고양이 Mar 11. 2019

직업병의 세계

업무에 매진한 착한 직장인의 훈장 같은 거?


친구와 북카페에 갔다. 바닐라 라테를 두 잔 주문하고 볼만한 책들을 스윽 넘기며 한 권 골라 자리로 돌아왔다. 친구가 안 보인다. 화장실에라도 갔나 싶어 조금 기다려본다. 여전히 종적이 묘연한 그녀. 제법 규모가 큰 북카페라 사각지대가 곳곳에 있다. 커피가 식을세라 찾아 나선다. 그리곤 발견! 저 구석에서 손님들이 다 보고 쌓아 둔 책들을 맹렬히 정리하고 있는 그녀를. 전직 사서의 웃픈 뒷모습.



근데 남 일이 아니다. 공연 기획일을 하다 직종 자체를 바꾼지도 한참이 지난 요즈음. 여전히 공연장에 가면 비뚤어진 입간판을 몰래 똑바로 세우고, 팸플릿의 오탈자에 빨간펜 선생 노릇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통번역 일을 하는 지금은 또 어떤가? 엊그제 새롭게 화재보험을 들면서 약관 내용을 숙지하는 대신 머릿속으로 시키지도 않은 번역을 하고 있다. 이쯤 되면 내가 내 직업인지, 내 직업이 나인지 나비박사 장자님께 여쭤보고 싶어 진다.




언젠가 동호인 모임에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직업병 있으신 분, 손? 하고. 뭔가 웃기면서도 각 직업별 애환이 느껴지는 답변이 이어졌다. 동질감으로 찐하고 짠한 웃음을 유발하는 그런.


음료수만 보면 원료명과 배합비, 농축 함량을 확인하는 병이 생겼어요.  (음료회사 연구원)

우체국에서 택배 상자를 대충 싼 사람을 보면 대신 싸주고 싶어요. ㅎㅎ  (자영업자)

조사를 잘 못 사용한 문장을 보면 마음이 답답해져 옵니다. 하아- (학습지 편집자)

카페에서 음악을 들으면 꼭 계이름으로 노래해봐요. ㅋㅋ  (피아노 선생님)

자동차 번호판이 죄다 4자리 잉크 카트리지 번호로 보입니다!  (전 HP 직원)

길 가다 사람들 몸 틀어진 거 체크해요. 고관절이 틀어졌네 하고 ㅋㅋ  (요가 선생님)

엑셀이나 PPT 글씨 크기가 통일되지 않았거나 제목이 고정 안 되어 있으면 불안 불안합니다. ㅠㅠ (사무직)

카톡이나 문자의 마지막 인사는 늘 제가 담당합니다. 안 그러면 뭔가 찝찝해서요.  (영업직 사원)

새로운 밥집에 가면 천장부터 쳐다봐요. 덕트 라인이 잘 빠졌네 마네 하면서요. ㅋ  (공기순환기 전문가)


나는 이 증상을 업무 후 스트레스 증후군이 아닌 자랑스러운 직무 무공훈장이라 명명하기로 했다.

세상에 얼마나 열심히 일했으면 언제 어디서든 업무 습관의 잔재가 이리도 징하게 배어나오나 하고.



지금 이 시간 혹여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직업병으로 고생하는 분들 계신가요? 

그렇담 스스로 수고했노라 쓰담 쓰담해주기로 합시다.

하루하루 그만큼 인이 배기도록 치열하게 일해왔다는 증거니까요, 밥벌이 연대 동지 여러분.



매거진의 이전글 포근한 밥상의 비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