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에 매진한 착한 직장인의 훈장 같은 거?
친구와 북카페에 갔다. 바닐라 라테를 두 잔 주문하고 볼만한 책들을 스윽 넘기며 한 권 골라 자리로 돌아왔다. 친구가 안 보인다. 화장실에라도 갔나 싶어 조금 기다려본다. 여전히 종적이 묘연한 그녀. 제법 규모가 큰 북카페라 사각지대가 곳곳에 있다. 커피가 식을세라 찾아 나선다. 그리곤 발견! 저 구석에서 손님들이 다 보고 쌓아 둔 책들을 맹렬히 정리하고 있는 그녀를. 전직 사서의 웃픈 뒷모습.
근데 남 일이 아니다. 공연 기획일을 하다 직종 자체를 바꾼지도 한참이 지난 요즈음. 여전히 공연장에 가면 비뚤어진 입간판을 몰래 똑바로 세우고, 팸플릿의 오탈자에 빨간펜 선생 노릇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통번역 일을 하는 지금은 또 어떤가? 엊그제 새롭게 화재보험을 들면서 약관 내용을 숙지하는 대신 머릿속으로 시키지도 않은 번역을 하고 있다. 이쯤 되면 내가 내 직업인지, 내 직업이 나인지 나비박사 장자님께 여쭤보고 싶어 진다.
언젠가 동호인 모임에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직업병 있으신 분, 손? 하고. 뭔가 웃기면서도 각 직업별 애환이 느껴지는 답변이 이어졌다. 동질감으로 찐하고 짠한 웃음을 유발하는 그런.
음료수만 보면 원료명과 배합비, 농축 함량을 확인하는 병이 생겼어요. (음료회사 연구원)
우체국에서 택배 상자를 대충 싼 사람을 보면 대신 싸주고 싶어요. ㅎㅎ (자영업자)
조사를 잘 못 사용한 문장을 보면 마음이 답답해져 옵니다. 하아- (학습지 편집자)
카페에서 음악을 들으면 꼭 계이름으로 노래해봐요. ㅋㅋ (피아노 선생님)
자동차 번호판이 죄다 4자리 잉크 카트리지 번호로 보입니다! (전 HP 직원)
길 가다 사람들 몸 틀어진 거 체크해요. 고관절이 틀어졌네 하고 ㅋㅋ (요가 선생님)
엑셀이나 PPT 글씨 크기가 통일되지 않았거나 제목이 고정 안 되어 있으면 불안 불안합니다. ㅠㅠ (사무직)
카톡이나 문자의 마지막 인사는 늘 제가 담당합니다. 안 그러면 뭔가 찝찝해서요. (영업직 사원)
새로운 밥집에 가면 천장부터 쳐다봐요. 덕트 라인이 잘 빠졌네 마네 하면서요. ㅋ (공기순환기 전문가)
나는 이 증상을 업무 후 스트레스 증후군이 아닌 자랑스러운 직무 무공훈장이라 명명하기로 했다.
세상에 얼마나 열심히 일했으면 언제 어디서든 업무 습관의 잔재가 이리도 징하게 배어나오나 하고.
지금 이 시간 혹여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직업병으로 고생하는 분들 계신가요?
그렇담 스스로 수고했노라 쓰담 쓰담해주기로 합시다.
하루하루 그만큼 인이 배기도록 치열하게 일해왔다는 증거니까요, 밥벌이 연대 동지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