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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일루아의 고양이 Mar 21. 2019

순수한 노년이란 존재하는가

진짜의 멋


어떤 이는 마음에 큰 족적을 남긴다.

찰나의 시간을 함께했더라도 잔상이 길고 깊게.

일상 속에 파묻혀 잊은 듯했다가도 순간 후욱-하고 영혼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는 존재.

나의 세 번째 할아버지라 살갑게 불러보는 한묵 화백님이 그러했듯이.


98세의 청청한 젊음 (사진: 뉴시스)


이번 주말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한묵: 또 하나의 시(詩) 질서를 위하여> 전.

작년부터 이어진 전시지만 발걸음을 내딛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할아버지의 첫 유고전인지라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굵고 날카로운 슬픔이 앞섰기 때문.



1961년, 그는 홀연히 파리로 떠났다.

그의 나이 48세.

홍익대 미대 교수로서 안정된 위치와 보장된 미래를 시원스레 벗어던진 채 예술가의 도시로 향했다. 교수가 아닌 화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남긴 채. 진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오늘날 한국 기하추상의 거장으로 숭앙받는 그이지만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다다른 파리의 삶은 녹녹지 않았다. "예술가란 부유해지면 맑은 정신을 잃게 된다"는 그의 신념이 이끄는 대로 수도하는 고승처럼 창작에 임했기 때문. 예술에 있어서만큼은 매서울 정도로 자신을 다그친 한묵 화백이지만, 인간 한묵 할아버지로서 기억하는 그는 더없이 다정한 외할아버지 같은 따스함을 지닌 분이었다.


83세의 한묵 화백. 내 어릴 적 기억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리 독야청청하게.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할아버지를 처음 뵌 건 내 나이 11살 때.

프랑스 파리에서였다.


울퉁불퉁한 돌길 한편 육중한 대문을 힘겹게 열고 들어서면 사각 하늘 사이로 네모난 햇빛이 나를 반긴다. 그 사각형 햇볕을 가득 머금은 중정을 지나 6층까지 빼곡하게 오르는 나선형 계단. 그의 기하학적 작품의 모티브는 바로 이 나선형 계단이 아니었을까? 하고 남몰래 궁금해했던 바로 그 계단이다.


할아버지의 집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카오스 안에 질서 정연한 법칙이 있었다. 저 난리통 속에서 어떻게 필요한 것들만 그리 쏙쏙 챙기신담. 어린 마음에도 자못 신기할 정도로. 말간 미소를 늘 입가에 달고 다니시던 할아버지가 특히나 함박웃음을 짓는 순간은 바로 원하던 물감을 마음껏 살 수 있을 때. '돈이 생기면 화방에 가서 물감을 여기부터 저 끝까지 다 살 거야!'라며 신나 하시던 할아버지의 영혼은 순수한 아이 그 자체였다. 11살의 나보다도 더 맑디 맑았던 그. 온 마음을 다해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이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벅찬 반응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린 화백님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한 번은 할아버지 내외분과 우리 가족이 다 함께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지방으로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에트르타(Etretat)와 도빌(Deauville)을 가보고 싶어 했던 할아버지. 그리 보고프셨던 코끼리 바위를 보자마자 차에서 내려 한달음에 훨훨 날아가시던 그 가뿐한 발걸음이 생생하다. 내가 언젠가 할아버지의 나이에 이르면 그리 가볍게 통통, 신나게 폴짝폴짝 뛰놀 수 있을까? 영혼이 투명한 자만이 내딛을 수 있는 사뿐함으로 기억된다.



한 방에서 옹기종기 지내던 우리는 오랜 드라이브와 산책으로 노곤하던 그 날에도 밤늦게까지 방에서 컵라면에 와인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달님이 꼬박 넘어가는 줄도 모른 채. 할아버지는 강렬한 색채의 그림만큼이나 색색의 만담 보따리를 지닌 천상 이야기꾼이었다. 졸린 가운데도 귀를 쫑긋거리며 다음 일화를 끄집어내게 만드는 그런.


대학생이 되어 다시 찾아뵌 할아버지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국물의 쌀국수 한 그릇을 대접해주셨다. 파리 베트남 구역 똥끼누아의 진한 추억. 할아버지의 뜨끈한 사랑이 느껴지는 한 끼였다.



일찍이 모던아트협회를 결성해 흔히 '이발소 그림'이라 일컫던 사실주의 화풍의 국전에 대항한 새로운 조류를 이끈 한묵 화백. 그의 화풍은 1969년 이전과 이후로 극명하게 나뉜다.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인간이 달에 첫걸음을 내딛는 장면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이후 3년 간 붓을 들지 못했다. 구시대의 공간 개념을 뛰어넘어 시공을 결합한 4차원의 세계를 화폭에 담고자 했던 그. 평면의 캔버스에 움직이는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이어갔다. 끝없이 순환하는 이 거대한 우주의 에너지를 백지에 담아내기 위해.


그의 작품에서 현대적인 기하추상임에도 구도하는 수도승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직접 작품에 맞는 컴퍼스를 제작하고 단 한 명의 조수도 없이 모든 작품에 자신의 혼을 담아낸 그. 다가갈 수 없는 어떤 경지에 이른 자에게서만 느껴지는 경외감이 깃든다.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곤궁하리만치 청렴한 예술가의 삶을 꼿꼿하게 이어왔어도 103세의 천수를 누리신 한묵 화백.

그 비결은 끝내 맑은 빛을 잃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깨끗한 영혼에 있지 않았을까?


영원한 청년, 한묵 화백님.

기하추상처럼 나의 유년에 켜켜이 파장을 일으킨 한묵 할아버지.

그늘 없이 활짝 핀 그 웃음이 오늘 먹먹하게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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