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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완 Mar 06. 2017

하루키의 처방전

야매 득도 에세이 #9







무라카미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조난당한 한 남자가 튜브를 붙잡고서 표류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똑같이 튜브를 붙잡은 한 여자가 헤엄쳐 온다. 그들은 나란히 바다 위에 떠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눈다. 그렇게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눈 후 여자는 어딘가 있을지도 모를 섬을 찾아 헤엄쳐 가고 남자는 그 자리에 남아 맥주를 마신다.

여자는 이틀 낮 이틀 밤을 헤엄쳐서 어딘가의 섬에 도착하고 남자는 그 자리에서 술에 취한 채 구조대에 의해 구조된다.


몇 년 후, 이 둘은 어느 고지대에 있는 작은 술집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데 여자는 굉장히 혼란스러워한다.

 

 "나는 팔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열심히 섬까지 헤엄쳐 갔다구요. 너무나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말이죠, 몇 번씩이나 이렇게 생각했죠. 내가 잘못했고 당신이 옳았는지도 모른다고 말예요. 나는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어째서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다 위에 가만히 떠 있는 걸까 하구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은 '남자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고백한다.

하지만 남자는 살았다. 열심히 헤엄친 그녀와 똑같이.




20대 때 이 부분을 읽었을 땐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라고 생각했었다.(그럼에도 나는 하루키의 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뭔 소린지도 모르면서.)

최근에 다시 이 책을 읽었을 땐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하루키, 혹시 이런 걸 말하고 싶었던 거야?' 이런 느낌이랄까.


우리는 어릴 때부터 정신교육을 받는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돼.'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노력하지 않고 얻은 성공은 비겁한 거야.'

이런 교육 말이다. 우리는 그 말들을 신앙처럼 품고 살아가게 된다. 그 말들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세상을 좀 살아보면 알게 된다. 아니, 살면 살수록 아니라는 것을 더 크게 느낀다고나 할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 혼란스러운 거다. 우리의 가치관이 흔들리니까.


열심히 하지 않고 별다른 노력하지 않아도 다 가진(혹은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데 점점 빈곤해지는 사람도 있다. 수백 번의 오디션을 본 후에야 배우로 데뷔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친구 오디션에 따라갔다가 쉽게 데뷔하는 사람도 있다. 멀리서 예를 들 것도 없다. 아주 공을 들인 작업은 별다른 성과를 못 냈는데 대충대충한 작업이 좋은 성과를 내는 경우,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것이다. 그렇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반드시 보상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열심히 안 했다고 아무런 보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믿었던 것과는 다르게 인생은 이처럼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아무런 노력도 하지 말고 대충 살자고 말하고 싶은 거야?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한 사람들의 성과를 다 부정하고 싶은 거야? 흙수저는 노력해도 안 되니까 금수저로 다시 태어나란 소릴 하고 싶은 거야? 도대체 뭔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워워. 화가 나는 마음을 이해한다. 사실 나도 화가 난다.

이 스토리에 분노가 일어나는 사람들은 열심히 헤엄친 '여자'에 너무 감정이입이 되어서 그렇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그러니 이런 얘기가 불편하다. 노력하지 않은 사람도 똑같이 '구조'가 되었으니 말이다. 난 노력해서 얻었는데 넌 노력도 안 하고 얻었다고? 인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화만 낼 이야기는 아니다. 반대로 뒤집어 '남자'에 감정 이입해 보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있었는데 구조가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우린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혹시 이 세상은 살 만한 세상 아닐까?

'그건 운이 좋아서 그런 거지. 구조대가 안 올 수도 있었잖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여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근처에 섬이 없을 수도 있었다. 여자도 운이 좋았다.

결과적으로 여자도 남자도 똑같이 운이 좋았는데 여자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한다. 자신이 얻은 것은 노력으로 받은 보상이라 생각하고 남자가 얻은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우리가 지금 괴로운 이유는 우리의 믿음. 즉 '노력'이 우리를 자주 배신하기 때문이다.

나는 죽어라 열심히 노력하는데 고작 이 정도고, 누구는 아무런 노력을 안 하고도 많은 걸 가져서다. 분명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배웠는데. 또 노력하면 다 이룰 수 있다고 배웠는데. 이상하다. 뭔가 속아서 잘못 살아온 것만 같다. 그렇다고 노력을 멈출 수도 없다. 노력하지 않으면 그나마 지금 정도도 유지하지 못할 것 같아서다. 어떻게 사는 게 맞는지 알 수 없어서 괴롭다.


왜 노력이 우리를 배신하는지, 그럼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어도 난 답을 알지 못한다.

다만 괴로움을 줄이는 법은 안다. 그것은 '인정'해버리는 것이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것도 있고, 노력한 만큼 보상이 없을 수도 있고, 노력한 것에 비해 큰 성과가 있을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인정해버리면 괴로움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으니 반드시 '이만큼'의 보상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괴로움의 시작이다. 내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보상은 언제나 노력한 양과 동일하게 주어지지가 않는다. 노력한 것보다 작게, 혹은 더 크게 주어진다. 혹은 아예 보상이 없을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노력한 것에 비해 큰 성과를 얻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비난하지 말고 그것 또한 인정해 줘야 한다. 그것은 나 역시 노력에 비해 큰 성과를 얻을 수도, 노력하지 않았는데 좋은 일들이 생길 수도 있다는 얘기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질투로 인해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런 행운들을 인정하면 더 많은 행운들이 찾아온다나 어쩐다나. 이건 믿거나 말거나.


앞서 얘기한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속 장면의 마지막은 이렇다.

괴로워하는 여자에게 뭐라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 남자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을 건넨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불공평하게 만들어졌다."

 "누가 한 말이에요?"

 "존 F. 케네디."

 

아아... 팩트 폭력인가.

케네디 밉다.

아니, 하루키가 밉다.

그러니까 이건 하루키의 극약 처방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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