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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인간

대충의 자세

by 하완




나는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책의 원고를 쓰고 있다. 약속한 원고 마감이 열흘 정도 남았는데 아직 다 끝마치지 못했다. 90퍼센트 정도 썼고 나머지 10퍼센트만 더 쓰면 되는데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째깍째깍.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며칠을 흘려보내고 나니 불안감이 밀려온다. 아아, 열흘 안에 끝내지 못할지도 몰라. 어떡하지? 이건 근래 느껴보지 못한 초강력 스트레스다. 아주 미쳐버릴 지경이다.

이쯤 되니 2월 말까지 다 끝낼 수 있다고 말한 나 자신이 원망스럽다. 더 여유를 두고 마감 날짜를 정할 걸 그랬다. 아니다. 날짜를 더 늦췄어도 나는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을 게 분명하다.

지난 몇 년간 나에겐 무한정의 시간이 있었다. 그럼에도 책을 끝내지 못했다. 내가 굳이 출판사와 마감일을 정한 것은 나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였다. 이런 압박이 없으면 이 일을 끝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창작이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행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야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고 여겼다. 어떤 외압이나 스트레스도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아이디어가 순수한 창작 아니겠냐고.

그래서 나를 구속하는 모든 것을 벗어나 책을 쓰기로 했다. 일부러 계약도 하지 않았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쓰고 싶은 얘기가 떠오를 때마다 쓰고 싶었다. 그렇게 몇 년이나 자유롭게 쓸 시간을 줬는데 정작 쌓인 글은 많지 않았다. 단순히 게으름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자유 안에서 길을 잃었고 방황했다.


‘이게 맞나?’


나는 글을 쌓아 올리는 대신 써놓은 글을 의심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썼다. 이렇게 쓰는 게 맞는지, 이런 글이 의미가 있는지, 이따위 글을 누가 읽어줄지.... 어쩌면 혹평만 받는 책이 될지도 몰라. 그런 생각에 이르자 더는 쓸 수가 없었다.


이러다간 죽도 밥도 안 되겠구나.


몇 년이나 방황한 끝에 내린 결론은 나에게서 자유를 박탈해야 한다는 거였다. 자유는 개뿔. 나는 그렇게 두면 안 되는 인간이었다. 약간 슬픈 결과지만 받아들여야지 어쩌겠나. 그렇게 자유 인간은 마감 인간이 되어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감은 지켜야 한다. 마감은 신성하다.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님의 유튜브를 보다가 글쓰기에 대한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그는 지금까지 100여 권이 넘는 책을 썼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많은 책을 쓸 수 있냐는 질문을 받고 자신이 처음 책을 쓴 계기를 들려줬다.

그는 처음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글을 쓰려했지만 몇 달 동안 한 페이지도 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한 잡지사에서 글을 연재해 달라는 요청이 왔고, 자신이 쓰려했던 내용으로 한 편씩 연재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감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힘들게 한 편 쓰고 나면 다음 마감일이 돌아오고, 밤을 새워서 어떻게든 마감일에 맞춰 글을 보내면 또 다음 마감일이 오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마감의 고통 속에서 1년을 연재하고 나니 한 권의 책이 되었다는 얘기였다. 그게 자신이 글을 쓰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는 글을 쓰지 못하는 이들에게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넣고, 노예처럼 족쇄가 채워진 채 끌려가듯 글을 쓸 것을 권했다.

그 얘기를 듣는 내 얼굴엔 웃음이 번졌다. 교수님 말이 너무 공감되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 내가 특별히 못난 인간이라 글을 쓰지 못한 게 아니었구나.

자유로운 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원래 힘든 일이구나. 그러므로 구속과 압박이 필요하구나.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비록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옳은 방법을 찾아낸 거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 모든 창작은 마감 속에서 이루어졌다. 늘 마감에 쫓겼고, 마감을 지켜내려 고군분투했다. 매번 못해낼 것 같다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떻게든 약속을 지켜냈다. 자랑은 아니지만, 마감을 어긴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마감 앞에서는 초인적인 능력이 발휘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압박이 즐거울 리는 없다. 그래서 마감 스트레스가 없는 여유로운 창작을 꿈꿨지만, 결국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동안 나는 마감의 도움으로 창작을 해왔던 거였다. 그 사실을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몇 년간의 방황과 시간 낭비는 없었을 텐데. 그래도 그 시간이 있었기에 이렇게 마감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그나저나 이번 마감일도 지킬 수 있겠지? 자신이 없다. 아아, 스트레스. 아니다. 이건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를 이용하는 거다. 나는 마감 스트레스를 이용해서 이번 책을 완성할 것이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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