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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완 Apr 03. 2017

길은 하나가 아닌데

야매 득도 에세이 #16






나는 불치병에 걸렸었다.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입시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병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이름은 '홍대병'이었다. 내가 입시를 하던 당시 이 병에 걸려 무려 7수를 하고 있다는 입시생의 전설이 학원가를 떠돌았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홍대병은 그 정도로 무서운 병이었다. 다른 대학에 붙어도 홍대가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재수를 하고 떨어지면 또다시 도전하고 그렇게 일곱 번, 7년을 입시생 생활을 할 만큼. 그 무서운 병에 내가 걸렸다. 덜컥.

 

고3 때 홍대 시험을 봤지만 떨어졌다. 다른 대학에 붙었지만 가지 않았다. 대학의 레벨이 높아진다면 기꺼이 일 년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재수를 하고 다시 홍대에 도전했다. 그리고 또 떨어졌다.

이럴 수가. 아까운 내 일 년.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도전하라고 배웠어. 노력하면 안 되는 건 없어. 내 노력이 부족했던 거야. 한 번만, 한 번만 더 도전하자. 투자한 일 년이 아까워서라도 포기할 수 없지. 나는 그렇게 3수생이 됐다.


벌써 3수라니, 이번엔 꼭 붙어야만 한다. 누구보다 노력했고 누구보다 간절했다. 홍대에 붙게 해 달라고 매일매일 기도했다. 그런데... 맙소사 또 떨어졌다. 세 번째 낙방.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밤 나는 동작대교 위에서 차가운 강물을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내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세 번이나 도전했는데 떨어지다니. 이유가 뭘까. 나보다 못 그리던 얘들은 다 붙었는데 왜 나만. 긴장했던 탓일까. 홍대 입시장만 가면 한 번도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고 나오지 못했다. 아니, 거의 망치고 나왔다. 아, 누군가 실전에서 잘 하는 것도 실력이라고 하더라. 어떤 이유가 되었든 난 떨어졌고 그것은 곧 실력 부족, 노력 부족을 의미했다. 변명은 필요 없었다. 난 루저다.

부모님 얼굴을 어떻게 보나. 이대로 죽는 게 깨끗한 선택일까. 그래 죽자.

무서워서 못 뛰어내렸다.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여긴 왜 왔담. 비겁한 나를 마주한 것 같아 더 비참해졌다. 울면서 다리를 건넜다. 겨울바람이 아주 차가웠다.


여기까진가 보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대학에 입학을 했다. 두어 달 다녀봤는데 도저히 적응을 할 수 없었다.

'겨우 여기 오려고 3수까지 한 거야? 처음부터 네 자리는 여기였어. 주제도 모르고 덤비더니 꼴좋다.'

나를 괴롭히는 목소리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루저인 채로 살아가야 하는 건가. 이런 패배감을 안고 평생 살아가야 하는 거란 말인가.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내가 꼭 가고 만다. 그렇다. 그 병은 불치병이다. 어쩌면 그때 멈췄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부모님 몰래 자퇴를 했다. 학교를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다시 입시 준비를 했다. 4수였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나에겐 그곳에 가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고 다른 길은 없었다. 아, 7수를 한다던 그 입시생. 거짓이 아니었구나. 바로 나 같은 인간이 그런 입시생이 되는 것이었다. 고작 대학교의 간판을 위해서 7년이라는 시간을 보낼 가치가 있을까 싶지만 그때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눈에 뭐가 씐 게 분명했다. 아무튼.

시간이 흘러 다시 겨울이 오고 홍대 시험을 쳤다. 그리고 그 해, 나는 네 번의 도전만에 홍대에 합격했다.


이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서 꿈을 이룬 성공스토리쯤으로 읽었다면 한참 잘못 해석한 거다.

이건 잘못된 목표가, 오직 한 가지 길밖에 없다는 믿음이,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내가 홍대를 갈망했던 이유는 그것이 내 인생을 바꿔 줄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어른들은 좋은 대학만 들어가면 인생이 성공으로 끝나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다들 미대 중에선 홍대가 최고라며 입을 모았다. 홍대만 나오면 대기업들에서 앞다투어 스카우트를 한다는 소문도 들렸다. 바로 저기다. 저기만 들어간다면 내 구질구질한 인생도 한 방에 바뀌겠지. 아무도 날 무시하지 못할 거야. 지금 내 상황에선 저곳만이 유일한 희망이야.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홍대에 입학했지만 내 인생은 변하지 않았다. 캠퍼스의 낭만이나 배움의 열정은 개뿔. 오직 학비를 벌기 위한 노동만이 있을 뿐이었다. 대기업들이 스카우트한다는 소문은 말 그대로 소문이었다. 각자 알아서 자기 살 길을 찾느라 바빴다. 그리고 난 길을 잃었다.


홍대라는 목표로 4년 간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목표에 도착하고 나서야 목표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그 목표는 제일 중요한 게 빠진 채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목표인데 제일 중요한 '나'가 빠졌다.

남들보다 좋은 대학. 남들보다 좋은 스펙. 남들보다 좋은 회사. 남들보다 높은 연봉. 남들보다. 아아... 내가 좇은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남들이 거기 가면 좋다니까 간 거고 남들보다 높은 곳에 서고 싶다는 경쟁심으로 정해진 목표였다. 대학에 왜 가고 싶은지, 무얼 배우고 싶은지, 그런 건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그냥 홍대만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아... 다시는 이런 목표는 세우고 싶지가 않다.

 

"공부 열심히 해야지."

"그래야 좋은 대학에 가지."

"좋은 대학에 가야 좋은 회사에 가고."

"좋은 회사에 가야 돈 많이 벌어."

어른들의 이런 얘기가 완전히 틀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완전히 정답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인생에는 수많은 길이 있는 거니까. 그런데도 모두들 입을 모아 그 길만이 옳다고 얘기한다. 조금이라도 다른 길로 가면 반대부터 한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공부나 해', '취업이나 해', '그런 거 한다고 돈이 되냐' 이런 비난이 쏟아진다.

어차피 어른들 말 안 듣고 자기가 좋아하는 거 하는 아이들은 자기 꿈을 좇아간다. 부모도 못 막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님과 선생님 말씀대로 공부만 열심히 한다. 좋은 대학 가려고 애를 쓰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려 노력하고, 돈 많이 벌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쿠쿵. 무너진다.

'이게 뭐지? 이렇게 사는 거 맞는 건가? 나는 뭣 때문에 사는 거지? 내가 하고 싶은 건 뭐지? 내가 좋아하는 건?'

진작 했어야 할 질문들이 뒤늦게 몰려와 늦은 사춘기를 겪는다. 내가 그랬다. 한참을 잘못 달려온 기분. 난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방황은 길을 잃었을 때 시작된다. 난 오랫동안 길을 잃고 방황했다.


오랜 시간 방황했고 사실은 지금도 방황 중이다.

아마도 방황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길 중에 잘못된 길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았다. 그 길은 절대 안 간다. 그 길을 제외한 나머지 길에서 방황을 할 생각이다. 언젠간 나만의 길을 발견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길은 절대 하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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