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함에 대하여>를 읽고, <아이히만 쇼>를 보고 엮어 쓰다.
영화 <The Eichmann show> (아이히만 쇼)는 3월 2주 차에 읽었던 책 <잔혹함에 대하여>와 함께 엮어 리뷰를 써보려고 한다.
<잔혹함에 대하여>는 줄곧 '악과 잔혹함의 평범성'을 논한다. 악과 평범함이라는 단어가 나란히 놓일 수 있는 단어인지 아리송할 수 있다. 나에게도 굉장히 생경한 개념이었다. 단 한 번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에 대한 나름의 답은 우연히 관람하게된 아이히만 쇼에서 찾을 수 있었다.
포커스를 TV-다큐멘터리 총감독 레오 허위츠에 맞춰서 영화를 바라보자면, 이 영화가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대상은 아이히만이 아니다. 아이히만이 지녔을, 아니. 지녔으리라고 희망하는 '인간적인 감정'. 그게 악과 평범함을 연결시키는 단 하나의 매개물이므로.
"악행은 타고나길 특별하게 악한 사람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파시즘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아히이만도 만들어진 악인이라는 것을.
레오 허위츠는 악을 특별하게 대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악인을 특별한 존재로 격상시키는 행동을 그만둬야만 한다. '악과 잔혹함의 평범성'이라는 문장의 수수께끼는 여기서 풀린다. 악인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지 팔다리 달린 평범하고 멀쩡한 인간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며, '인간성이 없나 보죠'라는 말로 퉁치면 안 된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건 가장 내 마음 편할 수 있도록 모든 상황을 대충 얼버무리는 문장이다. 악을 특별한 영역으로 올려놓는 순간 우리는 악에서부터 멀어진다. 절대 우리 내면에서는 발아할 수 없는 저 머나먼 씨앗처럼 여겨진다. 1조 원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것처럼. 멀어지는 순간? 우리는 분명히 외면한다. 나는 절대 악인이 될 수도, 그렇다고 피해자가 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어버린다. 믿을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단 하나도 없는데도 인간의 상상력은 때때로 그토록 무한하게 작용한다. '악=평범'이라는 공식을 인정해야만 단죄가 불가능한 영역에서부터 단죄가 가능한 선택의 영역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책임을 묻고 이를 통해 예방수단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에까지 나아갈 수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는 마치 악이 불가사의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인 양 반응한다. 우리 같은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 밖의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악에 대한 정의가 아니다! (잔혹함에 대하여 중, P.41)
나치군의 수장인 아이히만은 사방에서 옥죄드는 시선과 카메라에도 불구하고 아이히만은 끝내 자신의 행동을 시인하지 않는다. 단지 전체 기계가 돌아갈 수 있도록 일조했던 하나의 부품이라고 말하고 만다. 어쩔 수 없었음을 들먹이며 행동 기반의 선량함과 그로 인해 발생한 온갖 참혹한 범죄를 용서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다수의 나치군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파시즘이라는 극단적 전체주의에 동의해 잔혹한 행위를 서슴지 않고 행한 주제에, 참혹한 지옥을 겪어온 증인 앞에서까지 가증스러운 태도를 유지한다.
아이히만의 주장에는 일말의 논리가 존재한다.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국가에 속한 시민으로서 국가가 추구하는 이념에 반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을 민주주의 국가로 떨어뜨려 놓는다면, 같은 행동을 하게 될까? 대답은 '아니오'이다. 환경이 바뀌면 행동이 달라진다. 상황이 변하면 선택이 달라진다. 즉, 악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천적 특성도 아니고 남들과 다른 독특하고 유별난 재능도 아니라는 것이다. 환경과 상황에 의해 이리저리 주물러져 악의 형태를 띄게 되는 것. 단지 그것 뿐이다.
까다롭고 애매한 사안들을 강제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 그 사안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또한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려는 바가 분명해질 때까지, 그리고 어떤 구별을 적용할 것인지 확실해질 때까지 다양한 논거와 증거들을 인내심 있게 살펴보아야 한다. (잔혹함에 대하여 중, P.32)
일련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던 레오 허위츠는 결국 절망에 빠지고 만다. 아이히만을 무너뜨리지 못했으므로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어느 누구도 극악한 역사를 똑바로 마주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판 전 과정의 방송을 제작, 기획한 밀턴은 허위츠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어조는 신념처럼 단호하다. '아이히만이 무너지지 않으면 어떱니까. 우리가 이렇게 생존자들의 증언을 방송함으로써, 앞으로 전 세계는 유대인들에게 행해졌던 잔혹한 행위에 대해서 어떠한 다른 의견도 말할 수 없을 겁니다.' 또한 레오 허위츠가 머무르는 여관 주인 란우드 부인도 덤덤하게 속마음을 표한다. '그전까지는 내가 말해도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게 사실일 수 있냐면서요. 제가 그렇게 이야기를 잘 지어냈더라면 할리우드에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이 듣기 시작합니다. 제 팔에 있는 번호에 대해서 묻기도 합니다. 그건 당신 덕분입니다.'
당신 덕분이에요. (Because of you).
'파시즘은 히틀러 머리를 날려버렸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다. 어디를 가든 파시즘은 계속해서 존재한다. 그들은 결코 죄를 인정하지 않는 인간성 말로의 괴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악인을 우리와 사지 팔다리 달린 평범하고 멀쩡한 인간으로 간주해야 하며, 그가 선택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고 단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그 누구든 간에 상황에 따라 악을 행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To learn." 그리고 하나 더. 배워야 한다. 역사를 살피고 악인을 되짚어 내가 속한 사회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흘러왔는지, 어떤 선택에 따라 현재 모습을 형성하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배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직면하는 힘을 반드시 길러야 한다. 설령 그 과정이 느리고 지루할 지라도. 역사를 살피고 악인을 되짚는건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