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 낭독
모임은 통제권 밖 어딘가로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회원 수는 어느새 50명을 넘겼고, 매번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아니, 보통 독서모임이 이래? 이 정도면 독서가 아니라 거의 혼밥모임 시즌2 각인데.’ 걱정 반, 이상한 흥분 반의 시간이 계속됐다. 대략 이런 식이었다.
“오늘 모임은 40명이 오셨네요.”
“이번엔 주제를 사랑, 정치, 취미, 일 4그룹으로 나눠볼게요.”
“사랑 그룹은 이쪽으로 모여주세요.”
사랑 그룹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게임의 룰이 바뀐다. 사랑은 원래, 책으로 시작해서 인간으로 끝나는 분야니까. 멀리서 보면, 솔직히 이건 독서모임이라기보다는 ‘책을 사이에 둔 느슨한 친목’에 가깝게 보이기도 했다. 책의 주제는 슬슬 주변 주로 밀려나고, 대화는 어느 순간부터 인생, 연애, 회사로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구조. 가운데 놓인 책은 마치 “우리 다 교양인입니다”라고 말해주는 공동의 알리바이 같았다.
책을 핑계 삼아 모였지만, 실제로 굴러간 건 관계였다. 그리고 그 관계는 종종 타인을 검증하기 전에 나를 먼저 흔든다. 독서를 매개로 대화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서로의 가치관을 더듬어 보게 된다. 누가 어떤 문장에서 오래 머무는지, 어떤 장면에서 갑자기 말수가 줄어드는지, 어떤 단어를 끝내 삼키지 못하고 꺼내는지. 그런 미세한 반응이 그 사람의 세계관을, 거의 본능처럼 드러낸다.
그러다 보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타인의 윤곽을 읽는 사이, 내 안의 기준도 슬그머니 정리되기 시작한다. 중요한 것과 못 참는 것, 그리고 유독 관대해지는 순간들. 마음속에서 조용히 메모장이 펼쳐지는 느낌이다. “아, 나는 이런 쪽이구나.”
이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라는 인간을 겉표지로만 다루기는 어려워진다. 말투나 태도 같은 외피를 손질하는 수준을 넘어, 그 아래에서 나를 지탱하고 있는 내적 형태 같은 것들이 자꾸 눈에 밟힌다. 가끔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 지금 책 얘기하는 거 맞지? 왜 갑자기 내 역사책을 낭독하는 것 같지?”
결국 독서모임은 책을 읽는 자리가 아니라, 책을 가운데 두고 서로를 통해 자신을 읽게 되는 자리였다. 책은 명분이고, 진짜 본문은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해 새로 정렬되는 ‘나’였던 셈이다. 고도의 자의식 출현. 나는 점점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는 법’을 머릿속에서 조립하며 관계를 대했다. 하지만 그런 매뉴얼은 말 한마디, 표정 하나, 타이밍 한 번에 기준이 툭 하고 기울었다. 그리고 흔들림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난 장면이 있었다.
그 무렵 모임 안에는 장애가 있는 한 친구가 있었다. 처음엔 솔직히 조금 낯설었다. 익숙하게 다뤄온 관계의 범주 밖에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머릿속에서는 늘 먼저 ‘이럴 땐 이렇게 해야 한다’는 도덕적 매뉴얼이 펼쳐진다. 나도 그랬다. 매뉴얼을 따라가듯 행동했고, 지금 돌아보면 그게 얼마나 서툴렀는지, 그리고 타인을 대하기보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불안부터 진정시키느라 더 바빴는지를 보여주는 증거 같기도 하다.
그 친구는 용기 있고 활동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순간부터, 어쩌면 나는 이미 한쪽으로만 이해하기 쉬운 틀로 정리해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이해 가능한 인물’로 먼저 만들어 놓고 바라본 셈이다. 무엇보다 계속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라는 질문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 질문 자체가 조금 우스워졌다. 관계는 매뉴얼로 수행하는 게 아닌데, 나는 자꾸 정답을 맞히려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으니까. 내가 통제하고 싶었던 건 그 친구가 아니라, 내 안에서 올라오는 낯섦과 불편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친구의 삶을 충분히 알지 못하면서도, 모르는 티는 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설프게 공감하는 척을 했고, 그 과정에서 그의 시간을 내 방식대로 단순화하거나 왜곡해 받아들인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과 ‘이게 과연 옳은가’라는 의심이 동시에 있었다. 조심하고 싶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다 결국 이상한 결론에 닿았다. ‘더 잘해주지 않으려 노력하자.’ 겉으로는 동등하게 대하겠다는 결심처럼 보였지만, 실은 내 불확실함을 들키지 않기 위한 방어에 가까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태도는 그 친구에게 오히려 편안하게 받아들여지는 듯했고, 관계는 깊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친구가 나를 ‘학습’하고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내가 던진 단어 하나에 유독 오래 반응하고, 그 단어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각을 붙잡아두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했던 말들이 그의 마음속에서 모양을 얻고 의미로 굳어지는 과정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느껴졌다. 점점 답답해졌다. 내 말과 태도가 누군가의 기준이 되고, 그 기준이 다시 나에게 어떤 역할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질문이 많아졌고, 나 역시 그 친구에게 기대하는 말과 행동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관계가 가까워진다는 이름으로, 나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고, 그 요구를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스스로 납득시키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가 나눴다고 믿었던 대화가 그에게 충분히 닿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런데 그 안타까움조차 어쩌면, ‘대화는 이렇게 닿아야 한다’고 믿고 있던 내 기준에서 나온 감정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그 생각까지 도달했을 때, 조금 깨달았다. 이 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내가 끝내 내려놓지 못했던 ‘확신하는 척’하는 태도 자체였다는 것을. 그리고 감당하지 못한 나는, 그 낯선 자아로부터 깔끔하게 도망쳐 버렸다.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믿어온 ‘사람’의 기준, 사람을 가늠하던 방식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한 건. 한 번의 경험이 내 시선을 바꿔놓았고, 그 변화는 모임 전체를 대하는 태도로 번졌다. 예전에는 재밌다거나 편하다는 감각이 먼저였다면, 그 이후로는 즐거움이 커질수록 몸 어딘가에서 조용한 신호가 함께 켜졌다.
웃음이 많아질수록 표정이 반 박자 늦게 따라가고, 거리가 좁혀질수록 시선은 자꾸 다른 곳을 더듬었다. 나는 두 마음을 동시에 안고 뛰었다.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과, 가까워질수록 무서워지는 마음이 같은 속도로 나란히 달려왔다.
그 두 마음이 동시에 뛰는 동안에도, 바깥의 시간은 내 사정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모임은 멈추지 않고 굴러갔다. 잘, 그리고 빠르게. 그리고 그 열기는 각자의 삶 한가운데까지 파고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느 순간부터는 다들 이 분위기가 뭔지 잘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있다. 일단은 즐겁다는 걸.
“독서는 모르겠고, 일단 즐겁다!”
누가 먼저 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그 문장을 집단 구호처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은 한쪽 방향으로 흘러간다.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이야기가 또 다른 이야기를 데려오고, 시간은 길어지고, “이쯤에서 헤어질까요?”라는 문장이 한 번쯤 떠올랐다가 곧바로 입 안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결과는 예측 가능했다. ‘독서’라는 중심축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지만, 주변에서는 다른 모임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한다.
홈파티, 카페, 전시와 공연 모임. 가끔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같이 있자’는 약속까지. 그리고 모임 후 당연하게 따라오는 뒤풀이. 이쯤 되면 책은 명분이 아니라, 서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들고 다니는 교양 부적에 가까웠다.
“우린 그냥 노는 게 아니야. 우리는 읽는 사람들이야.”
그럴싸한 구호와 함께, 우리는 서로의 벽을 허물며 가까워졌고 가까워진 만큼 더 빠르게 달렸다. 그 속도감이 좋았고, 브레이크 없이 더 멀리 가고 싶어졌다. 정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이상하게도 동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버리는 상황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다들 조용한 편인데, 모아놓고 몇 번만 말을 섞으면 갑자기 열기와 웃음이 순환하기 시작한다. 마치 “저희는 원래 이런 사람들 아닌데요”라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 그 표정 자체가 이미 충분히 ‘이런 사람들’인 집단처럼.
이런 분위기 속에서, 너나 할 것 없이 각자의 인생 안에 모임을 통째로 이식해 버리는 일종의 ‘일체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어제까지는 “적당히 거리 두자”를 신조처럼 들고 살던 사람들이, 오늘은 “벽은 허물려고 있는 거지”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물론 말의 출처와 동기가 무엇인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세워두었던 벽들이 기민하게 무너지고, 그 틈새로 기대와 호기심이 밀려 들어오면서 열기는 더해갔다.
적당한 선에서 늘 한 발짝씩 더 나아가는 게 인간의 특기다. 경계선을 마주치면, 멈추기보단 “여기까지도 괜찮지 않나?”를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거기에는 늘 그럴듯한 자기 합리화가 따라붙는다.
“그래, 내가 하는 모임은 고상하고 지적인 독서모임이야.”
“여기서 하는 친목은 좀 다르지. 지난 모임들은 그냥 술만 마시는 자리였잖아?”
그 말을 믿고 싶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술자리’라는 단어보다 ‘독서모임’이라는 단어가 훨씬 덜 죄책감을 주기 때문이다. 즐거움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때, 사람은 늘 동원 가능한 이름표를 찾기 마련이다. ‘책’만큼 단단한 이름표가 또 어디 있겠나.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고 나니, 남은 건 간단했다. 그냥 잘 휩쓸려 가기.
그때의 나는, 솔직히 말하면 그 열기에서 약간 비켜나 있었다. 아예 빠져나온 건 아니고, 한 발짝 옆에서 관찰 모드로 숨을 고르는 느낌. ‘아, 이 친구들 지금 진짜 활기찬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도, 머릿속 깊은 곳에서는 아주 다른 시뮬레이션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심해 어딘가, 아무도 못 보는 곳에서 천천히 땅이 갈라지고 있는 장면. 그 갈라진 틈으로 물이 빨려 들어가고, 그 아래에서는 묵묵히, 그러나 아주 성실하게 거대한 쓰나미가 만들어지고 있을 것 같은 이미지.
“와, 지금 이 장면 너무 좋다.”
“어이 근데 저기 멀리서... 뭔가 오고 있는 것 같지 않냐?”
두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특유의 양가성. 위에서는 웃고, 아래에서는 초조해하는 상태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감정이 올라왔다. 두려움. 나는 무서워하고 있었다. 또 사람들과 가까워졌다가, 결국 멀어지는 순간이 올까 봐. 상처받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아, 또 이 패턴이구나” 하는 인식이 더 두려웠던 것 같다. 겉으로는 웃으며 “우리 모임 진짜 좋다” 이러고 있으면서, 속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좋지. 그래서 이번 끝은 어떤 모양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