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이주민, 숨 고르기 (9)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by 백운

나는 완전히 속하지도, 완전히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애매함이 문제였다. 언제든 발끝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필요할 때만 슬쩍 안으로 들어갔다. 돌이켜 보면, 크고 작은 사건의 한복판에 슬쩍 발을 얹었던 순간도 적지 않았다.


“다음 주제 도서는 B님이 선정해 주실래요?”

“B님 이번 주말에 뭐 하세요?”


이런 말이 몇 번만 쌓여도 사람은 쉽게 착각한다. ‘아, 내가 여기서 꽤 중요한 사람이구나.’ 그래서 한 번쯤은 모임의 흐름을 ‘주도’했던 것 같기도 했다. 최소한 주도하는 사람처럼 굴었던 적은 있다.그렇게 ‘역할’이 생기니, 나는 점점 그 역할에 맞는 나를 꺼내 쓰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자아해체쇼도 덩달아 잦아졌다.


문제는, 그렇게 꺼내 쓴 말들이 꼭 내가 믿고 있던 ‘나’와 일치하진 않았다는 점이다. ‘나’라고 믿던 윤곽들이, 그때그때 필요한 말로 하나둘 튀어나오기 시작하자 묘한 위화감이 밀려왔다. 마음은 이쪽으로 가는데 말은 자꾸 다른 쪽으로 새는 느낌. 관객도 나고 배우도 나인데, 대사는 매번 즉흥으로 바뀌는 이상한 공연이 계속됐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그날의 나는 분명 즐거웠는데, 돌아보면 어딘가 과장된 표정이 겹쳐 보였다. 잘 보이려는 마음 때문인지,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는 건지. 이유를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건 있었다. 나는 조금씩 나를 연기하고 있었다.


더 우스운 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엔 별일 아니었던 것들이 말이라는 형태가 되면서 중요한 ’ 문제‘로 승격된다는 점이었다. 말로 꺼내는 순간, 그건 더 이상 ‘지나가는 마음’이 아니라 내가 남긴 기록이 됐다. 그러다 갑자기 ‘증거’처럼 보였다. “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는 자막이 뒤늦게 떠오르고, 그걸 본 나는 나를 또 심문한다. 그렇게 말이 나를 규정하고, 규정된 내가 다시 말을 검열하는 되풀이 안에서 혼자 빙빙 돌고 있었다.


결국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처음엔 작은 물음표였는데, 어느새 커다란 의심으로 번지고, 그 의심을 논리로 진압하려다 또 다른 의심을 키우는 방식이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내가 더 선명해질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더 잘게 분해되어 갔다. 그리고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라는 건 원래 완성품이 아니라, 말하는 순간마다 잠깐씩 조립됐다가 다시 해체되는, 꽤 임시적인 구조물일지도 모른다는 걸.


머릿속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논리를 펼치고, 각자 다른 지도를 펼쳐 보이던 시절. 그건 단순한 혼란이 아니라, 거의 처음으로 내 안의 분열을 또렷이 자각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제일 웃긴 건, 다음 자아해체쇼를 캘린더에 꼬박꼬박 추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흔들리면서도 성실한 척은 끝까지 하는 인간. 그게, 그때의 나였다.


사람의 스펙트럼은 내가 짐작해 온 것보다 훨씬 넓고 깊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그리고 솔직히... 이렇게 보이고 싶기도 하고.”


우리는 어느새 자신을 하나의 이미지로 디자인해서, 거기에 맞춰 살려고 든다.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느끼는 나와, 새로 발견된 나 사이에 자의식이 끼어든다는 것. 정해 놓은 이미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묘하게 분열되는 기분이 든다. 이때의 자의식은 거의 내부 검열관처럼 등장한다.


“잠깐, 그건 네 캐릭터 아니잖아.”

“그래도 오늘은 좀... 이럴 수도 있지.”

“이런 너, 너무 낯설다.”


이런 독백이 오래 이어지면, 설명 안 되는 위기감이 따라온다. 그래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어떤 틀 안에 자기를 집어넣고 싶어진다. 틀은 불편하지만, 동시에 편하다. 모서리가 있다는 건 그만큼 덜 흔들린다는 뜻이니까.


특히 그 틀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규칙일 때는 더 심하다. 새로운 모임, 새로운 도시, 새로운 인간관계 같은 것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대충 두 가지 선택을 한다. 1. 새로운 틀 안으로 들어가 보기. 2. 기존의 틀 주위로 벽을 더 높게 쌓기.


나를 지키려는 보수성은 벽과 참 잘 어울린다. “여기까진 괜찮은데, 그 밖은 좀...” 하면서, 벽은 조금씩 두꺼워지고 높아진다. 그리고 그 벽을 성실하게 쌓는 동안,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드라마가 없으니 평화롭고, 평화로우니 안전해 보인다. “나 꽤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켜낸 ‘나’가, 결국 예전과 똑같은 알맹이라는 사실을.


겉으로는 ‘성숙’인데, 안쪽에는 여전히 ‘불안’이 살아 있다. 다만 그 불안이 이제는 예의를 좀 배운 정도다. 불안이 고개를 들면 사람은 또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건 거의 저주에 가깝다. 접촉의 저주. 가만히 있으면 답답해서 움직이고, 움직이면 상처받아서 다시 웅크리고, 그러다 또 갑갑해서 다시 나가보고. 이쯤 되면 인간은 실존의 러닝머신 위에 올라가 뛰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 나아가진 않는데 땀은 난다. 땀은 나 있으니, 어쨌든 또 한 번 “움직였다”는 기분은 든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숨을 고르고 나서 바닥을 보면, 남아 있는 건 결국 텅 빈 자기 자신 뿐이라 또 흠칫 놀란다.


“어? 나 여기까지 왔는데… 나만 있네?”

“모두 어디 갔지?”

“아, 원래 없었구나.”


열심히 달렸고, 칼로리는 태웠고, 나는 흔들렸는데, 결국 제자리다. ‘제자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까지가 세트다. 아주 정교한 순환 시스템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선택은 어떨까. 용기 내서 새로운 틀 안으로 들어가 본 사람은, 대개 한 번쯤은 추락을 경험한다. 발을 딛고 있던 땅이 갑자기 꺼지는 순간이 온다.


“어? 내가 믿고 있던 원칙이 이렇게 허술했다고?”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었어?”


새로운 질문들이 들이닥치면, 내가 ‘나’라고 부르던 틀에 금이 간다. 그리고 그 금은 생각보다 빠르게 번져서,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그 충격을 견디는 일은 만만치 않다. 그럴 때마다 중얼거린다.


“그냥 가만히 있을걸...”


이 문장이 늘 우스운 건, 말하는 순간 이미 ‘가만히 있던 시절’이 사라진 뒤라서다. 인간은 늘 사후적으로 현명해지고, 그 현명함으로 다음 후회를 준비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한 번 새로운 틀을 맛본 사람은 예전의 완전한 고요로는 잘 돌아가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도 벽을 세우고 부수는, 이 알 수 없는 루프 속을 성실하게 회전 중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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