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이주민, 숨 고르기 (10)

도망이 아니라 생존입니다

by 백운

그리고 그런 되풀이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늘 집단 안에서였다. 추상적으로만 알던 이야기가 실제 장면을 얻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쓰나미가 도착했다. 우리들 주위로 설명하기 어려운 공기가 툭 던져졌다. 다들 뭔가 이상하다는 건 아는데, 그렇다고 먼저 입 밖에 내고 싶지는 않은 상태. 그럴 때 꼭 한 명쯤, 눈치 빠른 인간이 제일 먼저 그 기색을 알아챈다. 그 이상함이 ‘분열되는 나’ 때문인지, ‘타인’이라는 변수에 대한 두려움인지, 혹은 그냥 컨디션 난조인지, 어떤 꼬리표를 붙여도 결론은 늘 비슷하다. 결국 도망가고 싶은 타이밍이 온다. 원인이 무엇이든 몸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가슴은 ‘이쯤에서 빠지자’ 쪽으로 기울고, 발은 출구의 위치를 계산한다. 머리는 그걸 붙잡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들지만, 마음은 늘 실용적이다.


“어… 이거 좀 아닌 것 같은데?”

“나, 지금 약간 무섭다.”


이렇게 속으로 작은 경보가 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두 명씩 천천히, 아주 조용하게 발을 뺀다. 문제는, 그 발을 빼는 사람들 사이에 오묘한 인간관계들이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사람 사이의 화학 작용이라는 게 한쪽의 부재만으로도 순식간에 냉각되기 시작한다. 특정 몇 사람만을 바라보며 달리던 경주마들이,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나둘씩 힘이 풀려 낙마해 버리는 것처럼.


“쟤 안 나오면… 나도 뭐 굳이”

“갑자기 모임이… 조금 심심해졌네?


책도, 대화도, 성장도 아닌 이유로 나오던 사람들에겐 모임의 ‘간판’이 어느 순간 툭 떨어진다. ‘독서모임 다니는 사람’이라는 껍데기도 같이 벗겨지고, 남는 건 민망한 속살.


“그럼 나는 이제 뭘 하지?”


이 질문은 의외로 철학적이지만, 실상은 지독하게 생활적이다. 철학은 보통 근사한 마침표로 끝나지만, 이 질문은 결국 씻고 누워 이불 속에서나 정리된다.


나는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회전 다람쥐통 안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기분으로 그 장면을 구경하고 있었다. 결국 나도 벽을 쌓아놓고, 그 안에서 내가 떠난 자리를 계속 돌아보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건 단순한 구경이 아니었다. 괜히 저쪽만 더 또렷하게 보였고, 그 감정의 이름도 금방 드러났다. 부러움. 나는 끝내 못 건너간 쪽을, 저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건너가고 있다는 데 대한.


솔직히 말하면 혼밥모임에서 이미 한 번 ‘가벼움’의 맛을 본 몸이라, 그 유쾌한 구름 떼 속으로 쏙 들어가 함께 구르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었다.


“이번 모임은 여기서 마무리할게요. 오늘도 즐거웠습니다.”

“뒷풀이 장소 카톡에 올려둘게요.”

“B님, 이번엔 같이 가요. 또 빠지실 거예요?”

“저를 너무 쉽게 읽으시는데요.”

“왜요, 틀렸어요?”

“아직은 모릅니다.”

“근데 표정은 이미 집에 계세요.”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는 날이 있죠.”

“오늘은 좀 같이 가면 안 돼요? 저희 금방 끝나요.”


거절을 어렵게 만드는 말은 늘 그렇다. 한 사람 입에서 시작했는데, 어느새 합창이 되어 있다.


“진짜 잠깐만 있다가 가셔도 돼요.”

“뒷풀이가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냥 밥 먹고 조금 더 떠드는 정도예요.”


“...조금... 더요?”


또 이런 식이다. 겉으로는 웃고 있는데, 안에서는 이미 회의가 열려 있다. 안건은 단순하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단순한 안건이 늘 제일 복잡하다.


가면 뭐가 문제냐. 딱히 큰일은 없을 것이다. 그냥 밥을 먹고, 어쩌면 술도 조금 마시고, 적당히 앉아 있다가 들어오면 된다. 안 가면 뭐가 문제냐. 그쪽도 별일은 아니다. 조용히 집에 돌아가 씻고, 뒹굴다가 자면 된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양쪽 다 꽤 멀쩡한 선택지다. 그런데 사람의 머리는 원래 멀쩡한 선택지 둘만 남겨두면, 꼭 그 사이에서 혼자 비장해진다.


이럴 때 내 안의 자아들은 참 성실하다. 하나는 “이번엔 좀 섞여봐” 하고 등을 밀고, 다른 하나는 “적당히 빠지는 것도 능력이지” 하고 그럴듯한 명분을 입혀준다. 둘 다 말이 돼서 더 피곤하다. 그래서 나는 늘 그렇듯, 가장 사회적으로 무난하고 개인적으로는 가장 비겁한 문장을 골랐다.


“저는 갈 길이 멀기도 하고… 뒷풀이는 다음에 참석할게요.”


그러니까 그날 내가 망설인 건 단순히 뒷풀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늘 그렇듯, 관계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는 순간 앞에서 주춤한 것이었다.


다들 “오세요, 들어오세요” 하고 손을 흔들 때, 나는 왜 망설였을까. 그 순간 어디선가 영화 대사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왜 사람은 몸이 가는 길과 마음이 가는 길이 다를까.’


그냥 멋있는 문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내 상태 설명서였다. 나는 분명히 서 있었지만, 내가 딛고 있는 게 정말 ‘땅’인지 확신이 없었다. 단단한 지면이라고 믿는 순간마다 발밑이 미묘하게 출렁였고, 그 출렁임이 금세 두려움으로 번졌다.


“이게 정말 즐거움이라는 땅인가. 아니면 내가 ‘괜찮다’고 우기며 버티는 얇은 판때기인가.”


그러다 어느 순간, 내 안의 익숙한 얼굴을 보게 됐다. 관계가 깊어질 기미만 보이면 어김없이 불안해지는 얼굴. 몸은 “가자”고 외치는데, 손은 브레이크부터 더듬는다. ‘출발합니다’ 방송을 틀어놓고 정차 페달을 밟는 운전사처럼. 내 안에서는 서로 반대 방향의 명령이 동시에 내려오고, 그때마다 논리적인 자아가 늦지 않게 등장한다.


“더 가까워지고 싶지?”

“응.”

“그럼 왜 도망가?”

“가까워지면 무서우니까.”

“그럼 왜 또 가까워지려 해?”

“……”


내 안의 복잡함과는 별개로, 모임은 어느새 예전의 열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불꽃놀이처럼 한 번에 터지지도 않았고, 폭발음도 없었다. 다만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모임은 서서히 힘이 빠진 채 ‘쇠락’이라는 단어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엔, 이상하게도 환상적인 팀워크가 발휘됐다. 신호라도 맞춘 듯 모두가 거의 동시에 우르르 이탈을 시작한 것이다. 해산이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그게 모임의 마지막 합주처럼 들렸다.


멀리 휩쓸려 가는 ‘즐거움’이라는 배에 올라탄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그 배가 생각보다 빨랐다는 것.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하나둘 말없이 하선해 버렸다.


“나 이제 여기서 내릴게.”

“벌써? 이제 막 재미있어지려는 참인데.”

“재미있어지려는 게 문제야. 나, 재미있어지는 속도가 좀 무서워.”

“그럼 지금 도망가는 거야?”

“아니, 생존 전략이야.”

“그게 도망이랑 뭐가 달라?”

“이건 나를 지키는, 우아한 후퇴.”


어쩌면 그 하선은 단순한 이탈이 아니라, 나를 잃기 전에 나를 챙기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 눈에는, 조금 더 머물 수 있었던 사람들이 너무 빨리 내려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만 더 타보지. 거기서 너의 무엇을 발견할지 알고? “

“더 있으면, 나 진짜 멀리 가버릴 것 같아서.”


부러움과 끝에 대한 예감이 겹쳐 있었으니, 안타까움은 두 배였다. ‘왜 내려’ 싶기도 하고, 동시에 ‘그래, 내려야 할 때가 있지’ 싶기도 했다. 즐거움이라는 배는 우리를 태워주지만, 가끔은 목적지도 모른 채 속도만 올리는 법이니까.


그 배를 떠올리다 보면, 이상한 장면이 하나 더 따라온다. 배에서 먼저 뛰어내린 사람들이 구명조끼만 입은 채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모습. 이상하게도 다들 행복한 얼굴이다. 온화한 바다, 멀리 반짝이는 백사장, 피부 위로 지나가는 선선한 바람. 풍경만 놓고 보면 거의 관광 엽서다. 다만 그 엽서 한편에, 아주 작은 글씨로 이런 경고가 적혀 있을 것만 같다. ‘주의: 인생은 예고 없이 파도가 칩니다.’ 그 문장을 떠올리자마자, 나는 괜히 비장해졌다.


아마 그 비장은, 끝을 먼저 확신하려는 마음에서 왔을 것이다. 파도는 언젠가 오고, 떠 있음은 결국 표류가 되고, 저 웃는 얼굴도 오래가진 못할 거라고. 나는 늘 미리 결말을 써두고 그쪽에 기대는 편을 택했다. 맞히면 “거봐” 하고 안도할 수 있고, 틀리면 “그래도 난 조심했지” 하고 물러날 수 있으니까. 그러니 내가 지키려 했던 건 저쪽의 행복이 아니라, 결국 내 쪽의 안전이었는지도 모른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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