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이로 된 책을 좋아한다. 손가락 끝으로 맨들맨들하거나 까칠한 종이 질감을 느끼며 한 장 한 장 넘겨서 읽다보면, 머릿속에선 골판지 상영관이 세워지고 내 시선이 움직이는 속도대로 영화가 상영된다. 마음 같아서는 좋아하는 책을 잔뜩 사서 책장에 모두 꽂아놓고 싶지만, 내가 사는 곳은 평당 땅값이 제일 비싼 도시이다. 노동자의 신분으로 이곳에 흘러 들어온 내가 뿌리내리기에 이 땅은 상상초월로 비싸기 때문에, 나는 흙 없이 자라는 이오난사처럼 내 소유가 아닌 빌린 화분에 살면서 계약기간에 따라 옮겨 다니며 살아왔다.
방랑자의 슬픈 점은 짐이 많을수록 불편해진다는 것이다. 짐이 많아질수록 필요한 면적이 늘어나기 때문에 더 많은 보관료를 내야 한다. 생존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취향의 물건들을 많이 쌓아두는 것은, 흙 없이 떠다니는 사람으로서 이사의 부담으로 연결되는지라 책장에 원하는 만큼 많은 책을 꽂아두지는 못하고 있다. 책장에 입주하지 못한 책들이 책장 밖에서 야금야금 증식되어가는 건 또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도서관이다. 이 도시에 몇 년째 살고 있어도 내 발자국만 한 땅도 소유하고 있지 못했기에 한 번도 이곳의 진정한 주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무늬만 주민이더라도 어쨌든 구립도서관 회원증을 발급받을 수 있나 보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것은 마치 정글 속으로 사냥하러 가는 기분이다. 어떤 동물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안고 서가에 배열된 책들을 쭉 훑어본다.
상호대차와 예약 서비스라는 적절한 무기를 사용해서 목표했던 사냥감을 획득하기도 하고, 수풀을 헤치다가 우연히 발견한 원숭이같이 귀여운 책을 집어 오기도 한다. 그렇게 사냥한 책들을 잔뜩 짊어지고 집으로 가서,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나를 둘러싼 네 벽의 공간은 사라지고 책 속의 세계가 팝업북처럼 튀어나온다. 책들은 마음속에 새로운 공간을 심어놓으며 나를 꿈꾸게 한다. 비록 현실에서는 내가 소유한 공간이 없더라도 책 속에서는 온 세상을 머릿속에 둘 수 있다. 종이 위에 펼쳐진 상상의 공간에서, 나는 18세기 영국의 거리에 서 있기도 하고 꿈속의 동물들이 사는 숲속을 탐험하기도 한다.
도서관이 정글에서 책을 사냥하는 느낌이면, 서점은 누군가의 서재에 놀러 가서 주인의 취향이 담뿍 담긴 책장을 흥미롭게 구경하는 느낌이다. 나는 특히 독립서점을 좋아하는데 운영하는 분의 큐레이팅 취향을 느낄 수 있고, 그곳에서만 살 수 있는 개성 넘치는 독립출판물이 많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독립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다가 누군가가 오키나와를 여행한 사진으로 만든 독립출판물을 산 적이 있다. 책에 실린 아련한 필름 사진 때문이었을까, 담담한 시같이 쓰인 여행기 때문이었을까, 생각보다 그 책이 마음 깊숙이 남았다. 결국 나는 작가가 여행했을 때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을 때, 같은 여행지에 다녀왔다. 책에 쓰여있던 느낌과 똑같은 것을 내가 느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이 열어준 상상의 공간에 실제로 발을 내디뎌 본 경험이 재미있었다.
은희경 작가님의 『소년을 위로해줘』라는 책도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주었다. 소설의 등장인물이 프라하에서 백조를 봤는데 생각보다 시끄럽고 더러웠다는 대목을 읽었다. 그 구절을 읽고 내 두 눈으로 그 백조를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나는 첫 배낭여행을 프라하로 떠났다. 강에서 직접 본 백조들은 정말 소설에 나온 대로 어딘가 꼬질꼬질한 느낌이라서 재밌었고, 소설에 나온 장면을 실제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등장인물의 눈이라는 레이어가 내 각막에 옅게 겹쳐진 것 같아 기분이 묘하고 신기했다. 생각보다 지저분했던 백조처럼 기대만큼 프라하도 그렇게 낭만적이진 않았다.
느닷없는 비가 내리고 까맣게 변한 석상들이 가득한 어두운 프라하 거리를 걷다가 카프카가 살았다는 파란색 집을 찾아갔다. 가만히 앉아서 글을 쓰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카프카의 소설이 왜 그렇게 어딘가 우울한 분위기인지, 작가가 살던 공간에 직접 가보니 이해되는 것 같기도 했다. 책이 나에게 상상의 공간을 열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감히 그곳을 여행하겠다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나의 마음에 예기치 못한 파동을 일으키고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는 책을 만나는 것은 참 즐겁다. 지금은 방랑자의 독서를 하고 있지만, 언젠가 이오난사의 삶을 끝내고 내 흙이 담긴 나의 화분을 갖게 된다면 책장이 미어터지도록 소망했던 책들을 가득 꽂고 싶다. 그날엔 상상을 먹고 허공에서 웃자란 나의 줄기도 단단히 흙에 뿌리내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