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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양 Apr 13. 2024

털의 위로


고양이 털 많이 빠지지?


 

어느 점심시간, 부장님이 그리 물으셨다. 며칠 전부터 하나뿐인 아들내미가 고양이를 키우면 안 되겠냐며 떼를 쓴다고 했다. 하교 후 혼자 시간을 보낼 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이면서도, 생명을 하나 들이는 게 얼마나 수고로운 일인지 알기에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듯하셨다.



제일 걱정되는 게 털이라며 한숨 쉬는 그녀에게 나는 담담히, 고양이한테서 털이 많이 빠지는 게 아니라 그냥 고양이가 털 그 자체예요, 라 답했고 그녀는 바람 빠지듯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래도 방금 내가 한 초등학생의 작은 꿈을 무너뜨린 것 같지만 사실이었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건 털을 품는 일이다. 이따금씩 집 안으로 드리워진 햇살을 따라 걷는 우리 집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걸음걸음마다 하얗고 뽀송한 작은 몸통에서 털자락이 뿜어져 나오는 걸 목격할 수 있다.




자유의 몸이 되어 느긋하게 유영하던 털들은 집안 곳곳에 내려앉는다. 어제 읽다 덮어놓은 책 표지 위, 고양이가 마시는 물그릇 안, 내 무릎을 감싼 도톰한 담요 위, 심지어는 세수를 하고 물기를 닦아낸 수건에서도 하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이 녀석들이 대거 발견되는 곳은 옷방, 검은 옷들 사이다. 새로 짜인 패턴처럼 검은 옷을 뒤덮은 털자락을 보면 내가 털에 파묻혀 살고 있단 걸 다시금 실감하곤 한다.




고양이가 머물다간 옷을 입고 외출을 하려면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사람 머리카락보다 몇 배는 더 얇은 것이 얼마나 힘이 좋은지, 섬유 속에 콕콕 박힌 털은 끈적한 테이프에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럴 경우엔 일일이 손으로 꼬집어 빼내야 하니 바쁜 아침엔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옷은 집을 나서기 바로 직전에 갈아입는다. 고양이를 쓰다듬거나 비비적대는 애정표현도 그전에 마쳐야 한다. 행여 미리 옷을 걸치고 무심결에 소파에 앉아버리거나 고양이를 안아 들기라도 하면 수고로운 털 제거 과정을 다시 거쳐야 한다.






고양이와 가족이 된 이후로 청소에도 더 많은 공을 들이게 됐다. 이불과 베개를 비롯해 바닥에 깔아 둔 러그에 습관적으로 돌돌이 테이프를 밀어댄다. 강력한 끈끈이 테이프가 금세 하얗고 까맣고 가끔은 회색의 털로 뒤덮인다. 각종 직물에 묻은 털을 제거하려 테이프를 몇 장이나 쓰는지 모르겠다. 방금 밀어낸 곳에 테이프를 다시 가져다 대면 또 그만큼의 털이 묻어 나온다. 이쯤 되면 고양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털을 키우는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누군가는 질색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매일 치워도 매일 쌓이는 털이 곤란할 때도 있지만, 동시에 나는 그런 것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가 지금 함께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위로받는다.




내가 가장 공허하던 때 털이 지닌 온기와 향기가 얼마나 큰 위로며 응원이었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 그렇게 6년을 함께 하며 나는 그 털들 덕분에 어느새 따뜻하고 든든하게 채워져 있었다. 소설을 쓰는 로봇,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실현되는 세상에 살면서 여전히 서로의 말 한마디조차 이해할 수 없고, 그렇게 평생 다른 언어를 쓰며 어쩌면 지극히 일방적인 물음과 대답을 주고받겠지만, 그런 존재에게서 하루를 더 살아갈 위안을 얻는다는 건 말로 설명할 수 없이 놀랍고 소중한 경험이다.  







그렇게 작디작았던 아기 고양이는 어느덧 인간의 수명으로 마흔을 앞두고 있다. 벌써 삶의 절반을 지나고 있는 내 털 뭉치를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그 털 한 자락이 간절해질 날이 벌써 두려워진다. 검은 옷에 박힌 털을 빼내느라 한참이 걸리던 일, 퍼 놓은 밥 한 공기 위에 살포시 얹어져 있던 털을 보며 쿡쿡 웃던 일, 털을 빗을 때 목 안쪽에서 느껴지는 칼칼함 같을 것을 그리워할 날이 나에게도 분명 올 테니까 말이다.




아직은 먼 이야기겠지, 고양이의 볼을 부여잡고 이런 말 저런 말 구구절절 늘어놓으면 고양이는 나른한 눈으로 내 종아리 께에 머리를 부비고 털을 남긴다. 그럼 나는 현실로 돌아와 돌돌이를 밀어댄다. 그런 시간이 아주 오래 더, 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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