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것만 중요한게 아니다.
동티모르의 수도인 딜리 생활을 정리하고, 산을 돌고 돌아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도착할 수 있는 지방 ‘사메’로 파견이 되어 이사를 갔다.
동티모르의 총면적은 강원도 정도인데, 산악지대가 많고, 터널은 없으며, 길은 비포장도로가 많기 때문에 도시 간 움직임이 힘들 뿐 아니라, 그러한 이유 때문에 지방에는 물건들이 많이 들어오지 않아 살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나 역시 처음엔 정말 막막했다. 그래도 긴 인생을 살면서 언제 그런 곳에 살아보겠냐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을 좀 했다. 그래도 사메가 날 잘 받아주겠지, 하면서.
처음에 사메를 마주했을 때의 느낌은 뭐랄까, 높은 산속에 파인 한 구덩이 같았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정말 어디로 못 갈 것 같은 느낌을 주었고, 키가 큰 나무들 탓에 저녁에 해가 떨어지는 모습도 잘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깡시골 이긴 하지만 필수용품들을 파는 중형 크기의 가게들이 몇 개 있었는데, 한두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인들의 것이었다)
그렇게 며칠은 적응을 한다는 핑계로 조금은 심심하게 지내고 있는 와중에, 주 3-4회 정도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운동장에서 태권도 수업이 열린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태권도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교 때 많은 애들이 우르르 도복을 입고 다니는 모습 한 장뿐일 정도로 태권도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여기 와서 들은 한국어 ‘태권도’는 왜 그리도 반가웠는지 수업을 보러 가기 위해 땡볕을 무릅쓰고 한낮에 외출을 했다.
제대로 갖춘 게 없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아이들은 모두 도복을 입고 띠도 매고 있었다. 흰 띠부터 빨간 띠까지 있었는데, 그 사이에 나름의 위계질서도 있는 것 같았고, 시끄럽게 떠들지 않고 발차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젊은 여성분이셨던 사범님을 만나보니 설렁설렁하는 아이들은 이미 한 바탕 혼났을 것 같은 느낌이 머릿속을 스쳤다. 한국에서 배운 태권도를 동티모르의 작은 지방 사메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녀는 허리에 검은 띠를 단단히 매고 머리를 질끈 묶고 있었다.
그녀가 어쩌다 태권도를 배우고 가르치게 되었는지 몹시 궁금해 물어보고 싶어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으나, 앞으로 2시간은 더 있어야 끝이 난다고 하길래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들어가야 하는 나는,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 뒤로 약 일주일 뒤, 사메에서 다른 단원들이 주최한 한국어 캠프가 3일간 열렸다. 개막식에 사메 태권도팀이 축하 시범을 왔다. 전문적으로 태권도를 하는 아이들도 아니고, 흰 띠부터 빨간 띠까지 다양했기에 화려한 시범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앞차기와 뒤차기 등 한국어로 하는 태권도가 왜 그렇게 대견하고 감동적이었는지 내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주책맞게 눈물이 핑 돌며 이역만리 타지에서 태권도를 볼 수 있어 감사하다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K-pop부터 태권도까지 많은 것들이 이 곳의 문화적 영감이 되고 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을 보면서, (K-pop과 태권도에 일절 기여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동티모르에 이렇게 태권도가 자리 잡게 된 건, 동티모르까지 와서 태권도 시범을 하신 많은 분들과, 파병되어 태권도를 가르치신 분들의 결실이 아닌가 싶다.
예전에 태권도 교육 봉사로 해외에 파견을 앞두신 어떤 한 분이, 나에게 ‘지금 이 사람들은 먹고사는 것과 아프지 않도록 하는 것, 즉 식량이나 보건 쪽으로 돕는 것이 내가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인 것 같다. 태권도가 과연 얼마나 이들의 삶을 도울 수 있을까.’라고 회의감이 든다고 하신 적이 있는데, 다시 그 말을 들은 때로 돌아간다면, ‘당장 아프지 않게 먹고사는 것도 너무 중요하지만, 일상을 살아가는데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배운다는 것, 취미를 가진다는 것, 재미있는 문화생활을 하는 것 또한 너무 중요한 일인 것 같다, 물자품 조달과 보건만큼이나.’고 말하고 싶다. 그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이 친구들 덕분에 요즘 나도 태권도를 보는 재미에 빠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