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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Dec 20. 2019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청춘을 쓰는 사람들

케이팝 때문이 아니에요

KOICA 해외봉사단으로 동티모르에 파견되어 내가 하는 일은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이다. 내가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하면 꽤 많은 한국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한국어를 ‘왜’ 배우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케이팝 때문인가? 아니면 그냥 애들 불러놓고 한국어 가르치는 건가? 하하’라고 덧붙이며 웃음을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안타깝게도 당연할 수 있는 것이, 우리는 여태까지 외국어를 배우는데 혈안이 되어있었지, 우리의 모국어를 알려주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으며, 한국어를 배우는 게 어떤 쓸모가 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과는 다르게 동티모르의 청년들에게 한국어는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술이다. 동티모르의 일반적인 월급 평균은 약 15만 원 정도로, 물가는 한국보다 조금 저렴하지만(절대 다른 동남아의 저렴한 물가와 비교할 수 없다. 한국보다 ‘조금’ 저렴한 수준이다) 월급은 10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다. 심지어 저 정도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도 많지 않아 대부분 직업이 없다. 지방의 경우 상황은 더 심각하다. 그나마 동네에서 잘 산다고 하는 교장선생님의 경우 월급이 50만 원 정도 된다고 하니, 다른 일반 서민들의 삶은 어느 정도 짐작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국인 근로자로 한국에 가서 4-5년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은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수단이다. 이역만리의 타지지만 한국 공장에 취직해 일을 하다 오는 것은 이들에게 부자의 지붕에 오르는 가장 좋은 사다리로 알려져 있고, 어리게는 만 19살부터, 30대까지 다양하게 한국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렇지만 한국은 이들 모두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EPS-TOPIK이라는 한국어 시험을 통과해야 갈 ‘자격’이 주어지며, 자격을 받았다 하더라도 점수 줄 세우기를 하고, 여러 인적사항을 검토한 뒤 회사에서 그들을 뽑아야 한국에 갈 수 있다. 그런 과정을 거친 후 약 500명 정도만 한국 회사로 취직이 된다. 하지만 지원자는 약 5000명이다. 10% 남짓한 수만 한국에 가는 것이다.


그 500명 중에서 또 줄 세우기를 통해 어느 정도 한국어 시험 점수가 높은 사람들은 공장으로 취직이 되고, 아닌 사람들은 어업 쪽으로 넘어가 배를 타게 된다. 한 평생을 30도 이상에서 살아온 이들은 한국의 추위가 가혹하고, 섬나라지만 어업이 발달하지 못해 배 한번 타본 적 없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은 4년 뒤의 미래를 생각하며 한국으로 간다.


한국에 한 번 갔다고 해서 평생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4년 정도 일을 한 뒤 다시 동티모르로 돌아와야 하는데, 우리라면 외국 생활 4년 뒤 고국으로 돌아가면 무엇을 하며 먹고살지를 걱정하겠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 벌어온 월급과 퇴직금으로 대부분 봉고차를 사서 버스운전을 하기도 하고, 택시운전을 하기도 하고, 가게를 열어 자영업에 뛰어들어 돈을 벌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 돈으로 집을 사 온 가족이 제대로 살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할 수도 있다. 제대로 돈을 모아 온 사람들은 봉고차도 사고 집도 산다. 이러한 경우를 꽤나 많이 보았다.


내가 사메가 한국어 수업을 처음 열었을 때, 한 학생이 한국말로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 저 한국 일했어요.’ 나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학생이 있다는 것에 너무 반가워 무슨 일을 했었냐, 얼마나 살았냐, 어디에 살았었냐는 질문들을 해댔다. 그 학생은 아산에서 공장을 다녔다고 하며 사장님과 사모님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순간 ‘사장님 나빠요’라고 할까 봐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다행히 그 학생은 ‘사장님과 사모님 모두 보고 싶어요’라고 했고,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분들께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그리고 학생은 한국으로 한 번 더 일하러 가고 싶어서 한국어를 다시 배우러 왔다는 말과 함께 수줍게 자리에 앉았다.


꽤나 괜찮은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그는 곧 반에서 다른 학생들에게 ‘대선배님’이 되었고, 한국에서의 삶을 공유하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그의 말을 들으며 한국으로 꼭 가야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모습을 보였는데, 내 생각에 그의 말보다는 그가 한국에서 돌아와 지은 집들과 가게를 보며 그런 의지를 더 다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내가 백번 천 번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하는 것보다 그게 더 공부자극이 되었으리라.


이처럼 외국어를 십수 년 배우는데 많은 돈을 써 온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풍경들이 동티모르에선 펼쳐진다. 여기서 한국어를 배우는 이들은 그저 케이팝이 좋아서, 한국이 좋아서, 취미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하하 웃으며 한국어를 공부하지 않는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일과 한국에서 일하고 싶은 꿈은 우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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