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생고기도 직접 손질할 수 있는 경지
고향집 떠나 자취를 하며 혼자 요리를 해 먹는 것도 일이지만, 한국음식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이 곳에서의 자취는 그보다 더 어렵다고 단연코 이야기할 수 있다. 처음에 동티모르에 도착해 마트와 시장 몇 군데 순회하고 든 생각은 ‘대체 여기서 어떻게 무엇을 먹고살 수 있을까’였다. 역시 어딜 가나 먹는 게 가장 첫 번째 고민이다. 그래도 어쨌든 먹고살아야 하니 시장에서 눈에 불을 켜고 먹을만한 것들을 찾아 헤매며, 머릿속으로 요리를 해보았다. 이것들로 어떤 요리를 할 수 있을까.
첫째, 고기를 보러 갔다. 동티모르에선 주로 냉동고기를 먹는 듯했다. 냉장이건 냉동인 건 그건 문제가 전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마트의 고기들은, 얇은 비밀 하나에 감싸져 냉동고를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것도 모자라, 비닐들은 다 어디 한 군데씩 구멍이 나있었고, 고기들은 그 구석을 비집고 나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시장에서도 고기를 파는데, 땡볕 아래 생고기가 하루 종일 나와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 앞으로 오토바이도 지나다니고 흙먼지가 풀풀 날렸다. 저렇게 있는 고기를 먹어도 될지 심각하게 고민했으나 초반에는 음식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는 조언에 따라 일단 고기는 제쳐두기로 했다.
두 번째로, 야채들은 제법 싱싱하고 가격도 괜찮았다. 한국처럼 버섯, 호박, 숙주, 파, 미나리, 파프리카, 상추, 치커리 등 굉장히 많은 종류의 야채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네다섯 종류는 되어 보였다. 어차피 내 입장에서 야채는 다 맛이 거기서 거기에다가, 건강을 위해 속세 음식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내는 정도만 있으면 되니까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셋째로, 가공식품의 경우 인도네시아의 제품이 많아 보였고 좋은 마트의 경우 호주 제품들도 있었다. 빵, 과자, 아이스크림 모두 많았다. 가격도 저렴했다.
하지만 야채와 가공식품만 먹고살 순 없지 않은가. 그렇게 마트랑 시장을 다 봐도 뭘 해 먹어야 하는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아 처음에는 라면이나 먹기도 하고, 빵으로 때우기도 하고, 대부분은 그냥 밥과 계란의 조합으로 거의 매일 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주쯤 지났을까. 지금 위생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다. 너무 똑같은 음식만 먹어 이러다 쌀과 달걀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그때, 깨끗한 고기는 둘째치고 일단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트의 냉동고기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한인마트에서 고추장, 고춧가루, 짜장과 카레분말, 액젓, 소갈비 양념 등 여러 가지 부재료들을 사고, 처음에는 겁냈던 고기들을 마주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배탈도 나지 않았고 맛도 좋았다. 그렇게 하나 두 개씩 사서 요리를 해보다 보니 재미도 있었고, 내가 점점 어디다 내놔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요리를 할 때는 아무 잡생각 없이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특히 마늘을 까서 편 마늘로 썰거나 다져서 대량으로 얼려놓는 작업과 같이 작고 반복적인 일을 하는 날엔 시간이 금방가기도 하고,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기분이기도 했고,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마저 들었다. 마늘 다져놓는 일로 성취감이라니 좀 소박하지만, 진짜다. 그래서 지금도 무기력하거나 아무것도 하기 싫고 우울한 기분이 들 땐 마늘을 깐다. 여러분도 해보시라. 일종의 명상과 같은 효과도 주고, 성취감은 덤이다.
자취 경력 3년이지만 마늘도 까 본 적이 없고, 고기를 사서 직접 다져본 적도 없는 내가 이젠 그런 일들을 척척해내고 있다(물론 좀 귀찮을 때도 있다). 게다가 지금은 마트에 냉동고기가 없는 지방으로 파견되어 시장의 생고기를 요리하며 잘 살고 있다(냉장실에서 꺼내어주는 깨끗한 고기는 아니지만, 나름 무항생제에 목초 소고기들이다!). 앞으로 더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아볼 테다. 생존력만 점점 상승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