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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Jan 06. 2020

그리운 비 향기가 나서, 비를 피할 곳이 없어서.

갑자기 비가 내리는 동남아의 우기

요즘 매일 같이 비가 내린다. 안 내리는 날이 없다. 원래 낮에는 더워서 나가지 못할 정도로 햇빛이 쨍쨍 내리쬐었는데, 이젠 구름에 가려 어스름한 햇빛만 보일 뿐이다. 산이 높았던 것이었는지 구름이 낮게 깔리는 것인지, 멀리 보였던 산도 가려버렸다. 이게 진짜 우기구나 싶다. 그리고 난, 이 우기가 너무 좋다. 어렸을 때부터 비 오는 날을 자주 기다리곤 했던 탓이다.


한 다섯 살쯤엔가,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할머니 댁에서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자랐다. 완전 할머니랑 산 건 아니고, 유치원이 끝나고 할머니 댁으로 가면 저녁에 엄마가 데리러 왔다. 여러 가지 추억이 흐릿하게 남아있는데, 그중 가장 그리운 기억은 비가 많이 내리는 날 집 문을 열고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비를 감상했던 일이다. 할머니 댁은 작은 시골 동네에서 경사가 가파른 언덕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기에, 비가 오면 지붕으로 무수히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와 함께 그 빗방울들이 마당을 타고 내려가 언덕길 아래로 흘러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비를 보고 있으면 할머니는 항상 주전부리를 가져다주셨다. 이후 할머니 댁을 나온 뒤로는 쭉 아파트에 살았기에, 베란다 창문을 열어두지 않으면 비가 오는지도 모를 때도 많았고,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은 우산 아래밖에 없는 시간을 살았다.


그런데 동티모르에 와서 정말 여한 없이 빗소리를 많이 듣고 있다. 동남아의 우기는 한 번 내릴 때 한국의 태풍급으로 비가 내려서, 정말 빗소리가 크다. 물론 아파트가 아닌 1층 주택에 살고 있는 점도 한몫한다. 며칠 전 아침에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일곱 시쯤이었다. 매섭게 내리치는 비가 아니라 적당히 많이 내리는 비였다. 나는 이때를 놓치면 안 되겠다 싶어 벌떡 일어나 양치를 하고 아침을 빠르게 준비한 뒤, 비가 들어오지 않을 정도까지 창문과 문을 열고 책을 폈다. 왠지 아무 책이나 읽고 싶지 않아서, 진지하게 고민을 하다가 ‘아무튼, 술’이라는 책을 선택했다. 정보가 너무 많은 책은 많은 집중력을 요하기 때문에 빗소리를 조금 놓칠 것 같았다. 조금은 유머러스하게, 가볍게 풀어쓴 책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맛있는 아침을 집는 포크를 들고,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와 시원한 바람을 맞는 시간을 가졌다. 할머니 댁에서 있던 비와의 시간 이후로, 기분 좋은 비와의 추억이 하나 더 늘었다 싶었다.


엊그제는 산책도 할 겸 머리도 식히며 파도 소리도 들을 겸, 걸어서 바닷가로 나갔다. 어쩐지 비가 올 것 같은 구름이었지만, 요새 항상 이랬기에 별생각 없이 나섰다. 새까만 구름이 깔려있어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적도 많아서였다. 그렇게 바다에 도착해 용도를 알 수 없는 벽돌 위에 앉아 잠시 쉬었다. 유독 바람이 많이 불어 파도가 세게 치는 날이었다. 마침 파도소리를 들으러 왔는데 자체적으로 저렇게 볼륨을 높여주니 더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얼굴에 물방울이 묻었다. 처음엔 파도가 너무 세게 쳐서 물방울이 튀었나 싶었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하고 바로 이것은 바닷물이 아닌 비임을 자각했다. 곧바로 세차게 비가 내렸다. 나에게 도망갈 틈도 주지 않고서.


비를 피할 곳이 없었다. 주위는 온통 모래사장이었고 가게라곤 하나 없었으며, 그나마 버려져있던 건물의 지붕조차 비를 막기엔 역부족 같아 보였다. 바로 집으로 가야겠다 싶어서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달리기에서 꼴찌를 면해본 적이 없는 화려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처음엔 조금 뛰다가, 어차피 다 젖기도 했고, 뛴다고 해서 그다지 빨리 도착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냥 걸었다(사실 뛰는 게 힘들었다). 그렇게 집까지 걷는데, 주위를 보니 사람이 없었다. 왠지 모를 해방감과 함께 웃음이 나왔다. 비를 이렇게까지 맞아본 적이 언제더라. 아무도 보지 않는 이 속에서 터덜터덜 안경에 묻는 비를 닦으며 걷고 있는 나 자신이 뭔가 너무 웃겼다. 택시와 버스라는 게 없는 이 동네에서, 비가 이렇게 많이 와도 비 피할 곳 하나 제대로 없는 이 동네에서, 꾸역꾸역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 이 상황이 익살스러워서, 비와의 또 다른 추억 하나를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비가 많이 오는 상황에 혼자 그렇게 걷는 게 위험했을 수도 있는데(길이 좋지 않기 때문에), 무사히 집에 들어왔고 감기 하나 들리지 않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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