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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Feb 07. 2020

타국에서 홀로 응급실 가는 슬픔

집 떠나면 고생, 아프면 더 고생

얼마  봉사단원들 사이에 장염이 유행인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몇몇 사람들은 아메바에 감염되기도 했고, 아메바까진 아니더라도 가벼운 세균 감염성 장염에 걸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외국에서 음식이나 물이  맞을 경우 설사를 동반한 장염에 걸리기 쉽기 때문에 (특히 위생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는  곳의 경우는  하면  했지  하진 않을 것이다) 먹는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대로  식당에서 먹는 것이 아니면  먹지 않고, 특히 탭 워터를 조심하고, 정말 가끔 길거리 음식을 먹을  아플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먹곤 한다. 나의 경우도 그러한 조심들을 항상 하는데, 어디서 구멍이  것인지 며칠  지독한 장염이  찾아왔다.


장염이 걸린 시점은 내가 휴가로 동티모르의 수도인 딜리에  있을 때였다. 나는 동티모르의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올해 5 대사관이 주관하는 동티모르에 파견되었던 상록수부대 순직 장병 추모행사 영상 제작을 맡게 되어   관련해 수도로 올라온 참이었다.  6 정도 휴가를 사용했는데, 2일은 대사관에 가야 하는 일정이 있었고, 나머지는 수도에  김에 괜찮은 레스토랑도 다니면서 다른 동기 단원들을 만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휴가 3일 차부터 자꾸 설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언가 잘못 먹었다 싶은 느낌이 들었으나 처음엔 가벼운 설사 증세라고 생각했다. 지역을 옮겨 다닐 때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설사 증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고, 엄청난 복통을 동반했다. 내가  복통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서  이상  견디겠다고 생각했을 때쯤은 저녁 10시였고,  10시는 KOICA 제휴 병원이 문을 닫고도 1시간이나 넘은 시각이었다. 힘들지만  밤을 넘겨야 했다.


11시가 지났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열도 나기 시작했다. 일단 임시방편으로 열이라도 내려야겠다 싶어 호텔 리셉션에  비상 상비약이 있는지 물었다. 하지만  예상과  맞게 역시 구비된 약은 없었다. 방에 다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화이트 테마의 인테리어가 되어있는 깔끔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너무  같은 느낌이 들어 차가운  작은 호텔 방에, 어찌할 방도 없이 아파도 누워만 있어야 하는  상황이 너무 슬퍼지기 시작했다. 한국이었다면 지금쯤 엄마가 차를 끌고 응급실에 데려갔을 테고, 나는 아무런 절차 없이 진료를 받을  있었을 텐데,  12시가  되어 가는 시점에 나를 도와줄  있는 사람도, 나를 도와줄 시스템도 없는  곳이 갑자기 미워졌다. 눈물이 흐름과 동시에 서러운 흐느낌도 나왔는데  소리를 들을  있는 사람은  밖에 없었다. 울음소리는 작은 호텔  벽에 부딪혀 미세하게 울리는 듯했다.


KOICA 해외봉사단은 아플  유선으로 SOS 의료 상담을 받을  있다. 처음에는 SOS에서 기다렸다가 아침에 제휴 병원으로 가라고 했지만, 나의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는 것을 듣고 동티모르에 하나 있는 응급실로 가볼 것을 권했다. 그때는  12시가 넘었었다. 해가  이후에는 돌아다니지 않을 것을 권고하는 치안 상태를 가진  곳에서 새벽에 홀로 응급실을 가는  쉽지 않았다. 아픈 상황에 위험을 무릅쓰고 택시를 이용해 병원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고민이 많이 되었다.  밤에 택시를 여자 혼자 타도 되는 것인지, 정말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 아파도 병원 하나 가기 힘든  상황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러다 이대론   없을  같아 호텔 리셉션에 콜택시를 요청했다.


접수증

택시로 15 정도를 달리니 응급실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병원엔 사람이 많았다. 단연 외국인은  혼자였고 모두가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새벽 1시에 홀로 병원에 찾아온 동양인 여성  명이 눈에 띄긴 띄었으리라 싶다. 접수를   조금 기다리니  이름을 불렀다. 간호사나 의사 모두 영어를   몰랐다. 나의 짧은 테툼어로 최대한 자세히 나의 상태를 설명해보려고 하였으나 설사나 장염 같은 용어를 테툼어로  턱이 없는 나였다. 영어로 설사와 장염을 말했으나 그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청진기를 가져다 대고 복부를 여러  눌러본  갑자기 약을 처방해줬다.  분들을  믿는  아니었지만 왠지 찝찝했다. 나는 분명 테툼어로  상태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했고,  분들은 나의 영어를  알아들으셨는데 어떻게  약이 처방된 것인지 이해할  없었다. 약을 받고 나니 결제를 하라고 했다. 한화로  24000원이 나왔다.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야 했는데 병원비까지 내고 나니 현금이 없었다. 지갑엔 달그락 거리는 동전  개만 들어있었고, 주변엔 ATM기가 없었고, 걸어서 ATM까지 가기엔  새벽의 동티모르가 너무 위험했다. 나는 다시 호텔 리셉션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고 다행히 호텔 리셉션 직원의 도움으로 무사히 돌아올  있었다. 호텔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아까 병원에   보이지 않았던 동티모르의 새벽 모습이 보였다. 얼핏 보면 돌아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구석에서 옹기종기 모여 술을 마시는  같은 사람들이  있었고, 항상 30도를 넘는 낮과는 다르게 서늘한 공기가 가득  있었다. 낮엔 강한 햇빛과 밀집된 인구 탓에 뜨겁고 시끄러운 곳이었는데, 새벽은 혼자 돌아다니면 절대 안 될  같은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파서 추웠던 것인지, 새벽엔 원래 추운 것인지, 매일 입던 반팔의 소매가 많이 짧게 느껴졌다.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하고 호텔로 다시 돌아와 거의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잠에 들었다가, 배가 아파서 다시 깼다가를   반복하니 해가 떴고 병원 문이 열릴 시각이었다. 9시가 되자마자 KOICA 사무소에 내가 아팠던 사실을 알리고, 응급실에 다녀왔으나 지금 제휴병원에 다시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제휴병원에 가니 장염이라고 말했고, 요즘 설사 증세로 병원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우기고 비가 많이 오면 수질이  좋아져서 그럴  있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나는 피검사와 대변 검사를 했고 수액을 맞으며 1시간을 누워있었다. 약도 어찌나 많이 주시던지 하루 3  챙겨 먹으라고 하셨다. 이삼일 먹고 낫는다고 중간에 그만 먹지 말고 일주일을  채워서 먹으라는 당부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따뜻한 미소와 인자한 손길과는 다르게 영수증에 찍힌 가격은 지독했다. 한화로  44만 원이 넘게 나왔다. (물론 KOICA에서 가입한 보험이  부분을 처리해줘서 내가 부담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장염 하나에 44만 원은 조금... 너무하지 않나.)

동티모르 KOICA 제휴 병원 스탬포드 메디컬


  지독하게 아파보고 나니 타지, 특히 타국에선 절대 건강이 최고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설사가 한창 심했을  화장실에 앉아 하늘에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는지 모른다. 앞으로 착하게 살 테니 동티모르에서 아픈 일은  이상 없게 해달라고 외쳤다.  떠나면 고생, 아프면 고생, 혼자 있을  아픈 게 제일 서럽다는 말을 100% 공감하게 됐다. 이렇게 아픈 (?) 동티모르에서 응급실도 가보고, 타국에서 아픈 사람들의 고통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었으니  편으론  성장드라마의  편의 에피소드가 되었다 싶다. 이제 이건 알았으니 다신  아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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