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이랑 Oct 24. 2021

여덟 살 인생

공부 뭣이 중헌디

"책 읽을 수 있는 만큼 줄여. 한 권이나 두 권으로 줄이면 되잖아."

"싫어. 그럼 내 생각주머니가 안 자라잖아."

"대충 세 권 읽는 것보다 집중해서 한 권 읽는 게 훨씬 좋아."

"진짜야? 그럼 두 권으로 줄일래."

지금은 이 두 권마저도 읽지 않고 있다.


"엄마 나는 수학을 못하는 것 같아. 엉엉."

"흑흑, 엄마 내가 진짜 하기 싫은데 최선을 다해서 풀었어."

눈물 바람이던 수학 문제집도 지금은 멈춘 상태다.



첫째는 하교 후 바로 피아노 학원에 갔다가 집에 온다. 그 시간이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간. 매일 독해력 2장, 사고력 수학 3장 푸는 게 전부인데 채점을 하고 틀린 문제를 되짚어 보는 시간이면 늘 서로 감정이 상한다. 매일은 아니지만 자주 반복되는 패턴이다. 첫째는 제 나름대로 열심히 푸는데 모든 문제에 동그라미가 그려지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색연필을 든 나의 손이 'V'자를 그리면 첫째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틀린 문제를 다시 풀어보자고 하면 온 몸으로 짜증을 표현하는 덕에 나의 기분도 짜증으로 휩싸이고 만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어. 이렇게 엄마랑 다시 풀어보는 게 공부야."

"엄마도 그랬어?"

"당연하지. 엄마도 여덟 살엔 잘 몰랐어."

"진짜야? 알았어. 해볼게."


자기 주도 학습 능력이 중요하다기에 그 힘을 길러주고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는 연습을 해보자는 게 시작이었다. 주말엔 무조건 놀되 평일 5일은 그날의 분량은 꼭 해내자고 약속했는데 자꾸만 감정이 상하는 첫째를 보며 '이게 맞나?' 싶을 때가 많다. 학교를 그만두지 않는 이상 앞으로 12년의 교과과정을 따라가야 하는데 벌써부터 힘들어하네? 내가 아이를 힘들게 하고 있나? 아직 1학년이니까 다 하지 말아 볼까? 그럼 책이라도 좀 많이 읽었으면 좋겠는데 책 읽는 것도 안 좋아하고 어쩌지?

'다 필요 없고 행복'이라고 해놓고 학습지 두세 가지는 기본이고 영어, 수학, 주산, 바둑, 태권도, 검도, 수영 등 여러 가지를 하고 있는 첫째 친구들을 보며 자꾸만 흔들리는 건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엄마라면, 아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오은영 박사가 <대화의 희열>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이 질문을 했었다.

-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기말고사 수학 점수를 억하는 사람 있나요?

- 중, 고등학교 시절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졸음과 싸우며 공부를 해 본 기억이 단 한 번이라도 있으면 들어 보세요.

첫 번째 질문에는 그 누구도 답을 하지 못했는데 두 번째 질문에는 출연진 모두가 우르르 손을 들었다. 오은영 박사에 의하면 우리는 점수가 아니라 세수를 하고 허벅지를 꼬집고 눈을 비벼가며 열심히 했던  기억을 지고 살아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공부를 다 잘할 수는 없지만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 대뇌가 발달되고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한다. 공부는 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만 있는 아이에겐 '침대에 누워 있지 않고 책상에 앉아 있어 대단하다'라고 말해주면 된단다. 텔레비전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현실과는 괴리가 있어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나의 고민을 알고 있는 남편이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시키지 말라고. 그 말에 후회 안 할 자신 있냐고, 책임질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런 일 절대 없을 거란다.

그래서 나도 첫째에게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학교 숙제, 피아노 숙제는 꼭 하되 문제집 풀기, 책 읽기는 네가 하고 싶을 때 하자고.


그 후 첫째는 정말 숙제만 하고 나머지 학습에는 관심이 없다. 엄마의 마음은 불안하지만 첫째 앞에서는 늘 태연한 척 연기한다. 게다가 첫째가 매일마다 빠뜨리지 않고 하는 행위가 있는데 바로 소파에 기대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다. 미술학원 가는 시간이 될 때까지, 동생이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될 때까지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본다. 뭘 보고 있느냐 물으면 사거리의 신호등이 바뀌는 것을 본단다.

지난 주말 나들이를 다녀오는 길, 아이들이 모두 잠든 차 안에서 남편이 입을 열었다. 첫째가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 때 남편도 참 답답하단다. 하지만 그 행위가 첫째에겐 스트레스 푸는 게 아니겠냐며 계속 창밖을 보더라도 다그치지는 말자고 한다. 래서 바로 다음 날 남편에게 인증샷을 보냈다. 첫째가 지금도 이러고 있는데 나는 가만히 있는 중이라고.




오은영 박사는 육아의 궁극적인 목적이 '독립'이라고 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이로는 성인이 분명한데 사고나 행동은 그렇지 못한 '무늬만 성인'이 많은 세상이다. 어릴 때부터 제 몫은 늘 해냈던 첫째는 요즘 들어 부쩍 스스로 어린이로 성장 중이다. 혼자 무인 상점에서 아이스크림도 사 오고, 엄마 단골 카페에서 커피도 사 오고, 도서관에서 도서 대여와 반납도 하고, 잃어버린 외투 찾으러 학교에도 다녀오고, 동생 목욕까지 봐주는 똑 부러지는 여덟 살 인생을 살아내고 있다. 숙제하느라 놀 시간이 없고, 주말에 밀린 숙제를 해야 하는 여덟 살 인생은 나도 바라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엄마의 여덟 살 인생도 해가 질 때까지 노느라 바빴던 게 사실이다. '라떼'와는 공교육의 내용 자체가 많이 달라졌지만 첫째의 행복을 위해, 첫째의 독립을 위해 억지스러운 공부는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우리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서 함께, 실컷 뛰놀자.  






작가의 이전글 누군가 OFF 하면 기다려 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