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듯 아이들은 7시도 안되어 일어나 둘이 거실과 안방을 오가며 놀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자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최대한 휴일의 하루를 늦게 시작해보자는 결의라도 다진 듯 계속 이불과 딱 붙어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이따 놀이터에 나가자는 첫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우리 오늘 산에 갈까?"라고 내가 원하는 것을 슬쩍 던져봤는데 예상과 달리 녀석들이 기꺼이 낚여 주었다.
늦은 아침으로 전날 둘째 소풍 도시락에 넣고 남은 김밥에 달걀옷을 입혀 부쳤고 두둑해진 뱃살을 보며 가볍게 먹고 싶었던 나는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 샐러드를 한 접시 만들었다. 수박까지 배불리 먹고는 싱크대 앞에서 고무장갑을 끼며 "자, 이제 나갈 준비 하자. 치카부터 해."라고 외치며 행동 개시를 지시했는데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둘째의 버라이어티 한 투정이.
1차전, 칫솔을 바꿔달란다. 설거지를 하며 바꾼 지 며칠 안돼서 지금 안 바꿔도 된다고 말했는데 칫솔로 세면대를 닦아 버렸다고 첫째가 전해주었다. 하, 정말?
2차전, 산을 오르기에 알맞은 바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한 벌, 두 벌, 세 벌. 다 싫단다. 네가 원하는 것으로 입으라고 했더니 더울 것 같은 긴 바지를 꺼내 입는다. 갑자기 양치질을 하고 있는 나에게 오더니 엄마가 골라주는 옷을 입겠다고 한다. 그 바지도 괜찮다고 했지만 우는 소리와 함께 다른 바지를 입겠다며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한다. 남편이 나서서 다른 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는데 아까 입은 차림 그대로 방을 나온다. 아니, 갈아입지도 않을 거면서 왜 떼를 쓴 거지?
3차전, 동물 그림이 그려진 마스크를 씌워 주었다. 작년부터 잘 써오던 마스크인데 하얀 마스크를 달라고 한다. 휴, 그냥 쓰고 나가면 안 될까?
4차전, 두 번째 산행이라 그런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첫째가 가방에 간식을 담아 현관 앞에 두었다. 며칠 전에 슈퍼에서 고른 멘토스 통이 들어있었는데 둘째가 들고 가겠단다. 이거 들고 가면 산에서 엄마 손 못 잡고 가니 가방에 넣자고 했는데 싫단다. 그럼 들고 가라고 손에 쥐어 주니 내던지 듯 가방에 넣어 버린다.
여기서 우리 부부는 동시에 터졌다. 이미 오전 7시가 안된 시간부터 누나가 하지 말라는 대도 행동을 멈추지 않는 둘째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준 상태였다. 남편보다 일찍 이불과 이별하고 나와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아이들을 단속하던 나는 이미 화가 가득 차 있었다. 신발만 신으면 나가는 타이밍이었는데 안 간다고 으름장을 놓고는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아버렸다. 엄마, 아빠의 뒤를 바로 쫓아온 둘째가 "갈 거야! 갈 거야! 갈 거야!" 라며 울부짖기 시작한다. 가만히 보고만 있으니 "갈 거예요. 엉엉." 말을 높인다. 싸늘해진 분위기. 남편이 첫째에게 잠시 방에서 기다려 달라고 하니 조용히 첫째가 들어간다. 나는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위에 적힌 대로 네 가지를 손가락 접어가며 되짚었다. 산에 간다고 신이 났다가 그 기분이 산산조각 나버린 아이에게 이렇게 힘들게 하면 되겠냐고 따져 물었다. "아니에요. 말 잘 들을 거예요. 엉엉" 우는 둘째에게 남편이 다가온다. 자리를 피해주려 의기소침해져 있을 첫째에게 갔다.
"엄마, 나랑 여기 있을 거야?"
"응, 아빠가 말씀하실 건가 봐. 엄마랑 여기 있자. (방바닥에 어질러진 퍼즐을 보며) 퍼즐은 누가 이래 놨어?"
"아까 동생이 그랬어."
"엄마랑 이거 맞출까? 둘이 하면 금방 하잖아."
그렇게 모녀가 헬로카봇 퍼즐을 끝내고 엉덩이 탐정, 신비 아파트 퍼즐을 맞추는 동안 남편은 차분하게 둘째를 타이르고 있었다. 둘째의 울음소리가 잦아든다. 이제 나가면 되려나? 하고 부자의 분위기를 감지하는데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살며시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남편에게 안겨있는 둘째. 아이고, 울다 지쳐 잠이 들고 말았구나.
잠을 푹 자고 일어난 둘째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넨다.
"엄마 아까 화나게 해서 미안해."
"아니야, 엄청 속상했지? 엄마가 화내서 미안해. 이제 안 그럴게."
"이제 엄마 말 잘 들을 거예요."
이렇게 우리 모자는 또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고 친정엄마가 '네 아이들은 어쩜 그렇게 사과를 잘하느냐'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아이에게 먼저 사과를 받고 말았다. 결국 우리 가족은 늦은 점심을 먹고 오후 늦게나 되어서야 산에 다녀올 수 있었다. 물병 두 개와 간식이 들어있는 가방이 꽤 무거운데도 하나도 안 무겁다며 허세를 부리는 둘째가 귀여워 한 장 남겼다.
의도한 건 아닌데 모자와 가방이 깔맞춤 되었네.
산에 오르며 왜 그렇게 화를 내냐고 묻는 남편에게 며칠만 혼자 떠났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던 터였는데 이렇게 글로 써놓고 보니 별일이 아니다. 둘째는 잠이 와서 더 투정을 부렸던 것일 게고 본인도 뜻대로 되지 않으니 더욱 모나게 굴었을 게다. 그까짓 거 칫솔 바꿔주면 되는데, 처음부터 입고 싶은 옷을 고르라고 하면 되는데, 다른 마스크로 꺼내 다시 끈 줄여주면 되는데, 텅텅 빈 것 같았던 '인(忍)' 곳간에서 뭐라도 끌어다 쓰면 됐을 것을.
글쓰기에 치유의 힘이 있다는 걸 들어만 봤지 느껴 보지는 못했는데 이 글을 쓰면서 느낀다. 사실 최근 며칠간 전업주부로서의 삶에 과부하가 온 건지 감정 컨트롤이 굉장히 힘들었다. 집안일은 계속하는데 돌아서면 또 해야 할 타이밍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 부딪히는 남매는 계속 신경 써야 하고, 나는 밥 생각이 없어도 식구들 끼니는 챙겨야 하고, 초등학교 1학년인 첫째의 학습을 봐주다 보면 안 좋은 분위기로 마무리되는 날이 더 많고, 지난달부터 챙겨야 할 이벤트가 많아 '텅장'이 되어 버린 금액을 보며 생각이 많아진 요즘이었다. 내가 해내야 할 몫들인데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 의욕은 꺾여 가고 자꾸만 가시처럼 돋아버리는 화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해졌으리라.
아, 이런 걸 치유의 글쓰기라고 하는구나. 며칠간 엄마의 날카로움을 많이 봤을 아이들에게 한없이 미안해지는 밤이다. 수없이 했던 다짐이지만 다시 한번 해본다. 밝아올 아침에는 화내지 않는 엄마가 되겠다고. 웃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엄마가 되겠다고. 위험한 게 아니면 다 들어주는 엄마가 되겠다고. 우리 집을 늘 따듯한 바이러스만 떠다니는 곳으로 만들어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