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이랑 Jun 14. 2021

우리집에 피아노가 생겼다

초등학교 6년 내내 피아노 학원을 다녔던 나는 그렇게 갖고 싶었던 피아노를 5학년 때 새 아파트로 이사 가면서 갖게 되었다.

피아노에 관심이라고는 전혀 없으신 줄 알았던 아빠는 엄마랑 연애시절 다방(?)에서 흘러나왔던 노래라며 빛바랜 듯한 노란색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악보를 퇴근길에 사 오시기도 했고 나는 피아노가 생겼다는 기쁨에 하농이며, 체르니며 학원에서 배우던 책들을 모조리 가져다 놓고 매일 뚱땅거린 기억이 있다. 피아노 학원 연주회 곡이었던 '소녀의 기도'는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끔 칠라치면 손이 저절로 음직이곤 했다.

부모님은 내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셨을까? 피아노를 좀 더 일찍 사줄걸 그랬다며 아쉬운 말씀을 여러 번 하신 탓에 나는 나중에 내 자식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면 피아노만큼은 빨리 사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첫째가 초등학생이 되고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작년에 태권도 학원을 보내달라고 반년을 조르길래 코로나 핑계로 미루다가 결국 등록을 시켰건만 두 달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둔 전력이 있던 녀석이라 걱정이 앞섰다. 다른 건 괜찮아도 피아노만큼은 꼭 흥미를 갖길 바랐다. 부디 '재미없어', '그만 다닐래'라는 말은 듣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피아노를 사줘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보니 내가 쓰던 피아노 생각이 절로 났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피아노 전공을 해보지 않겠냐는 학원 원장님의 권유(내가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의례적인 권유였을 것이다. 아, 다른 친구들보다 손가락은 길었다)가 있었지만 이미 '방송국 PD'라는 직업에 꽂혀 있었던 나는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피아노 학원도 미련 없이 그만두게 되었다.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중학생은 찾아보기 힘들었던 그 당시의 분위기(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도 분명 한몫했을 터였다. 학원은 그만두었을지언정 틈나는 대로 피아노를 치면 좋았겠지만 큰 마음먹고 사주셨을 부모님의 마음은 헤아릴 겨를도 없이 피아노 뚜껑 한 번 열어보지 않은 날들이 이어졌다. 내가 결혼하면 꼭 가져갈 테니 팔지 못하게 했던, 친정집 거실에서 자리를 차치한 채 켜켜이 먼지만 쌓고 있던 피아노는 시간이 흘러 결혼은 했지만 17평 신혼집에는 감히 들어올 생각도 못한 채 결국 헐값에 팔려나갔다.

 

그 피아노가 여전히 친정집에 자리하고 있었다면 우리집으로 올 수 있었을까? 층간소음 문제로 업라이트 피아노는 제쳐놓고 음량 조절이 가능한 디지털피아노를 중고로 알아보고 있었다. 적당한 물건을 찾았다 하더라고 운반이 문제가 되어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옆 동에 사는 언니가 전자피아노를 정리해야겠다며 필요하냐고 묻는다. 버리지 말라고, 내가 사겠다고 하고는 5만원에 가지고 온 게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음량 조절이 가능한 우리집 디지털피아노


피아노가 생긴 이후 첫째가 오후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조금 달라졌다. 매일마다 피아노를 열고 바이엘을 치고 고양이의 춤을 알려주니 제법 따라 한다. 둘째가 오기 전까지 모녀가 나란히 앉아 피아노를 뚱땅거리는 날도 많아졌다. 새로 받아온 동요곡집을 연습하고 싶어 하길래 시범을 보여주니 '왜 엄마는 나보다 잘 치는데!'라며 토라지기도 하지만 종종 엄마가 아닌 피아노 선생님 모드가 켜지는 것만 주의한다면 첫째와 함께 피아노 앞에서 보내는 그 시간이 참 즐겁다.


첫째가 피아노에 흥미가 있었으면 했던 이유다. 피아노를 안친 지 20년이 넘은 내가 높은 음자리표는 어떻게 그리는지, 2분음표는 몇 박자인지, 8분음표 두 개를 더하면 몇 분 음표가 되는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무지하게 헤매기는 해도 악보를 보고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 번 배워두면 평생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피아노, 아니 더 나아가 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주, 네 번째 학원비를 결제했다. 다행스럽게도 같은 학교 친구들이 많이 다녀서 그런지(태권도는 같은 유치원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즐거워하며 다니고 있다. 오늘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선생님 사랑해요. 피아노 학원 계속 다닐 거예요.'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선생님께 드리고 오기도 했다. 이 즐거움이 쭉 이어져 남편의 꿈인 '딸의 <사랑의 인사> 연주를 보는 것'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우리 딸, 파이팅!


작가의 이전글 이웃이 떠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