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이랑 Jun 23. 2021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를 목격하다

사실 시(詩)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브런치 작가가 되자마자 발행한 첫 글에서 시인과 아나운서(오창석) 작가님이 처음으로 라이킷을 눌러주시고 응원의 댓글을 달아주셨다. 감사하게도 구독까지 해주신 작가님 브런치를 찾았다가 아름다운 우리말과 그 말들로 빚은 시를 읽어 내려가며 우와, 예쁘다, 어떻게 이런 시를 쓰지? 감탄했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시를 쓰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나의 관심 분야는 아니었다. 브런치에서 종종 마주하는 시(詩)면 충분했다.




집 앞도서관이 있다. 시 창작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렸다. 처음엔 '저런 수업도 하는구나' 생각하고 말았는데 첫째와 등하교를 할 때마다, 슈퍼에 다녀올 때마다, 주차장에 들어올 때마다 보인다. '왜 이렇게 신경 쓰이지? 일주일에 한 번? 오전이네? 해볼까?'

도서관에 전화를 걸어 수업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는데 이미 마감이 되었단다. 대기를 걸어달라고 했고 다행히 첫 수업 바로 전날 연락을 받았다. 

"비대면 강의인 줄 알고 신청하신 분이 취소를 하셔서 참석 가능하세요."


다음 날, 수업시간에 임박해 의실에 도착했는데 앉아 있는 수강생들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아이를 등원, 등교시키고 오는 내 또래의 엄마들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던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앉아 있는 수강생들은 적어도 50대 이상으로 보였다. 나의 이모뻘, 엄마뻘, 할머니뻘 말이다.


1주 차 수업 내용인 '시의 의미와 가치 이해하기'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수업을 들어본 게 얼마 만이더라. 오랜만에 의자에 앉아 수업을 들으려니 몸이 배배 꼬인다. 젊은이의 집중력을 보여주고 싶은데 아뿔싸! 졸고 말았다. 강사님이 졸고 있는 날 보신 걸까? 강사님의 다른 수업에 참석하는 88세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시 공부를 왜 하시느냐 물으니 노후대책을 위해 배우신다고 하셨단다. 정.신.적.인.노.후.대.책.

'여기 88세보다 더 나이 많으신 분 안 계시죠?'라는 강사님의 물음에 앞에서 몇 분이 90세 어르신이 계시다고 답해주신다.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맨 앞자리에 앉아 시종일관 상체를 숙인 채 오른손에 든 돋보기로 교재를 읽어 내려가시던 할머님. 수업을 들으며 내 눈에 들어온 몇 분이 계셨는데 그중 한 분이 아흔 살 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흔에 뭔가를 배운다는 것은 TV에서나 봤지, 직접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문제가 생겼다. 아흔 살 어르신 목격 이후 나는 자꾸만 울컥한다. 북적한 카페 한편에 앉아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시야가 자꾸만 흐려지고 목이 멘다. 코는 분명 불 품 없는 붉은색을 띠고 있을 텐데 마스크로 가려지니 참 다행이다. 발행을 위해 글을 다듬는 지금, 또 앞이 흐려진다. 안경도 잘 쓰고 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흔이라는 연세에 시를 배우고 싶어 걸음 하시는 어르신의 열정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나의 치부가 들춰진 기분이다. 그동안 아이들을 키운다는 핑계로 배움에 대해서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살아온 나의 게으름, 의지박약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만 같아 부끄러워 죽겠다. 3주 차 수업이었던 지난주엔 어르신이 조금 늦게 오셔서 내 바로 앞자리에 앉게 되셨다. 멀리서 봐도 가까이에서 봐도 아흔의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검은 머리 가득한 곳에 흰머리는 듬성듬성 몇 개뿐이고 청록색 백팩에 진분홍 크로스백을 매고 오신 모습이 영락없는 학생의 모습이었다. 여전히 오른손에는 돋보기를 들고 교재를 열심히 읽어 내려가시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대단한 시를 지어보겠다고 신청한 수업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관심 분야는 아니었지만 이제라도 관심을 가져볼까? 글 쓰는데 뭐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나의 꿀 같은 오전 시간을 집안일, 커피타임 말고 다른 방향으로 의미 있게 보내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9월 말까지 진행되는 이 수업은 빠짐없이 출석할 테지만 이미 '시 창작'보다 더욱 값진 것을 배웠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를 몸소 실천해주신 할머님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휠체어를 타고 오시는 분, 점자교재를 이용해 수업을 들으시는 시각장애인 분을 보며 스스로를 채찍질해본다. 나이가 많으면 어때, 몸이 좀 불편하면 어때. 인생은 배움의 연속인 것을. 그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 지낸 나를 반성하며 인생에 '배움계획표'를 한 번 짜봐야겠다고 생각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집에 피아노가 생겼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