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이라 칭했지만 우리는 서로를 육아 동지라 여겼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엄마들의 나이도 고만고만, 아이들의 나이도 고만고만, 아빠들의 나이까지 고만고만하다 보니 금세 친해져 만 4년이 가까운 시간을 함께 했던 육아 동지. 그중 한 명이 최근에 이곳을 떠났다. 그래 봐야 차로 10분 거리지만 이제 '건너와'라는 말로는 쉽게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 한 구석이 휑해지고 말았다.
부모님의 신접살림은 5층짜리 주공아파트에서 시작되었다. 다른 이모(아줌마, 누구 엄마가 아닌 으레 이모라 불렀다)들의 나이는 여전히 모르지만 나와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많이 살았고 위로 아래로 서로의 집을 오갔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사진에 의지해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집 앞 풀밭을 뒹굴었고 철봉 나무(뻗어 나온 나뭇가지가 매달리기에 안성맞춤이었던 나무)에 매달렸다. 형형색색의 꽃잎을 따다 돌멩이로 찧었고 개미, 잠자리, 달팽이 등 눈에 보이는 살아있는 작은 것들을 잡았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 찾아보기 힘든) 드넓은 모래놀이터를 종횡무진했고 자전거를 타고 누가 더 빠르게 내려오는지 시합하느라 야트막한 언덕을 오갔다. 엄마는 이모 자식들의 끼니를 챙겼고 그동안 이모는 집안일을 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도 서로의 동생을 돌봤다.
그렇게 십여 년쯤 보내니 옆 동네에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우리 집도 그러했고 그 후 내가 살던 주공아파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은 대단지 고층아파트가 위용을 드러내고 있지만 엄마가 80년대 초중반에 이모들과 맺은 인연은 사라지지 않았다. 3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서로의 대소사를 챙기고 시간을 내 만나는 것을 지켜보며 그 끈끈함에 감탄했고 또한 부러웠다. 나도 그런 인연을 만났으면 좋겠다 싶었다.
육아 동지와 어울리며 자주 떠올리던 드라마가 있다. <응답하라 1988>이 방영되는 날이면 본방 사수하겠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 시기에 나는 층마다 열두 집이 있는 복도식 아파트에서 16개월 된 첫째를 키우고 있었고 혼자 지내시던 옆집 어르신과 소소하게 음식을 나눈 것 말고는 다른 이웃과의 왕래는 전무했다. 집 앞 놀이터에서도, 가까운 백화점 문화센터를 다닐 때도 늘 나와 첫째뿐이었는데 그게 편하다 여겼고 누군가와 친해지려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
1988년도에 고작 다섯 살이었던 나는 무엇 때문에 <응답하라 1988>에 열광했을까. 쌍문동 골목의 차고 넘치는 정에 꽂혀 매회마다 울고 웃었다. 덕선이, 정환이, 선우, 택이, 동룡이 5인방과 그의 가족들을 보며 작가가 설정해 놓은 덫에 그대로 걸려들었던 나다. 5인방의 엄마들이 나누는 정에 관련한 에피소드가 나올 때마다 엄마와 이모들의 인연이 겹쳐졌다.
우리는 남매맘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누군가 '한 번 놀러 오세요' 하자 '다음엔 저희 집으로 오세요' 했다. 그런 날이 쌓이다 보니 아빠들도 친해졌다. 첫째들이 등원하면 둘째를 데리고 함께 했고 둘째들이 등원하게 되면서 첫째들만 데리고 키즈카페를 가기도 했다. 아이 둘을 보내 놓고 우리끼리 가까운 곳에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기도 했다. 누구의 제안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온 가족이 모여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고 급한 일이 생기면 서로의 아이를 봐주고 내 아이들이 먹는 반찬에 양을 조금 더해 함께 먹는 날이 많아졌다.
육아 동지의 집에 수저가 몇 벌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런 일로 아이가 사랑스럽고, 이런 일로 화를 참지 못했고, 이런 일로 고민이 있고, 이런 일로 남편과 다퉜고, 주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터놓고 이야기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터지면서 예전처럼 왕래하지는 못했지만 작년 3월엔 아이들만 데리고 삼척에서 일주일을 함께 지내기도 했다. 패션 취향은 달라도 즐겨 보는 드라마가 같았고, 커피 취향은 달라도 즐겨 듣는 노래가 같았다.
삼척에서 여섯 명의 아이들
그랬던 육아 동지 중 한 명이 지난주에 떠났다. 이사 가서도 이렇게 좋은 언니, 동생들을 만날 수 있겠냐며 걱정하며 떠난 그녀가 전화기 너머 "언니, 여기는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하면 절반은 반응이 없어." 라며 더욱 걱정한다. 네가 좋은 사람이니 분명히 곁에 좋은 사람이 생길 거라는 말로 달래며 이사 선물로 뭐가 좋을지 고심 끝에 집에 어울릴 만한 화분을 하나 보냈다. 리본에 '사랑 가득한 ○○이네'라는 문구를 넣었는데 아이들 이름이 아니고 자기 이름 넣어줘서 감동이라며 도착한 화분 사진과 함께 카톡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한테 1순위는 네 아이들 아니고 너야'라는 답장을 보내고는 작은 것에도 감동받는 그녀와의 인연을 놓치지 않고 싶다고, 인연의 끈이 끊어지지 않도록 <응답하라 1988>을 본방사수할 때처럼 무던히 애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어본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다 같이 여행 한 번 가자고 내가 먼저 제안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