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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랑 Jan 22. 2021

임산부를 배려해 주세요

핑크색 좌석은 비워주시길

지난여름, 서울에 볼 일이 있어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핑크색으로 한눈에 들어오는 임산부 배려석에 누가 봐도 임산부가 아닌 사람들이 앉아있는 모습을 보며 씁쓸함과 함께 7여 년 전 일이 떠올랐다.




2013년 초록색 이파리들이 빨강, 노랑으로 물들어 갈 즈음 나는 첫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 한 모금 넘기기도 힘든 지독한 입덧이 시작되었고 태어나 처음으로 입원을 하며 다니던 회사마저 병가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자 줄어들었던 체중이 회복되고 식사도 적당히 할 수 있게 되면서 다시 출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배가 살짝 나오긴 했지만 두꺼운 외투에 가려 임산부로 보이지 않으니 가방에 임산부 고리를 꼭 달고 말이다.

그날도 퇴근길 지하철은 매우 혼잡했고 50대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께서 나의 임산부 고리를 보시고는 자리를 양보해 주셨다. 두 정거장 지났을까. 할머니 한분이 내 앞에 서시길래 바로 일어나 자리를 내어 드리니 한 아주머니께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어린 아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우린 이제 내리니까 여기 앉으라’고 하셨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며 앉으려는 순간 반대편 노약자석 앞에 서 계시던 할아버지가 내가 앉으려던 자리를 차지하셨다. 그때 모든 상황을 지켜보신, 나에게 처음 자리를 내어주셨던 50대 아저씨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제가 하나 알려드릴게요. 이 고리를 달고 있으면 임산부란 뜻이에요. (지하철 벽에 붙어있는 임산부 앰블럼을 가리키며) 여기도 보이시죠?”

그러자 “아, 난 액세서리인 줄 알았지. 여기 앉으슈.”라고 말씀하시는 할어버지에 뒤이어 “아이고, 미안하네. 여기 앉아요”라며 할머니가 동시에 나에게 자리를 내어주시려는 상황이 펼쳐졌다. 어르신들의 자리 양보에 어쩔 줄 몰라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나를 위해 용기 내어 말씀해 주신 그 아저씨의 마음은 울컥할 정도로 감동이었다.

한사코 자리를 거절하고 다시 선채로 가방을 뒤적였다. 더 많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뒤적여 봐도 한 개 뿐인 초콜릿을 그 아저씨께 드렸다. 진심을 담은 감사 인사와 함께.




주변 다른 엄마들과 이야기해보면 임신 중에 자리 양보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7여 년 전에도 임산부 고리를 달고 서 있으면 앉아있던 승객들은 모르는 척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임산부 고리를 달고 노약자석에 앉아있으면 어르신들은 젊은 사람이 왜 앉아 있냐며 일어나라고 큰 소리를 치는 분도 계셨다.

오랜만에 탄 지하철의 모습은 임산부 배려에 대한 인식의 개선이 그 때나 지금이나 제자리걸음인 듯 보였다. ‘젊음, 지킬 것은 지킨다’라는 주제로 텅 빈 노약자석 앞에 서있던 두 젊은이들이 나왔던 박카스 광고가 떠오른다. 그 광고의 파급 효과는 상당해서 그 후 비어있는 노약자석을 쉽게 볼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런 배려를 당연하게 여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임산부 고리, 임산부 배려에 대한 안내방송에 응답하여 임산부와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아이들이 얼마든지 배려받는 사회가 하루빨리 정착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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