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이랑 Sep 16. 2021

소고기 3등급을 사달라고?

건강검진 후 달라진 남편

취미도 식성도 잠자리 패턴도 다른 우리 부부가 통하는 게 하나 있는데 바로 떡볶이다. 아이들을 재워놓고 야식이 생각날 때, 남편이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때, 유독 버거웠던 육아로 매콤한 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때 우리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떡볶이를 먹었다. 곧 자러 갈 시간이어도 상관없었다. 떡볶이? 사둔 게 없는데? 재료 있어? 늦은 시간이어도 남편은 유튜브로 떡볶이 레시피를 훑고는 꽤나 정성을 다해 만들어 주곤 했다.   

우리 동네 30년 이상된 분식집 떡볶이. 하, 침 고이네.

그랬던 남편이 떡볶이를 끊은 지 3주가 다 되어간다. 떡볶이뿐 아니라 라면, 피자, 치킨, 빵, 과자, 아이스크림, 매일 하나씩 까먹던 야쿠르트까지 맛있다고 소문난 모든 것들을 끊었다. 남편은 본인의 건강을 위해 딱 세 달 동안은 앞에 언급한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정말 2주가 넘도록 먹지 않는 남편을 보며 의지 한 번 대단하구나 칭찬해야 마땅하지만 나로서는 함께 먹는 재미를 잃고 나니 인생의 재미마저 잃어버린 심정이다. 


올해 마흔이 된 남편은 위, 대장 내시경, 복부 초음파 등 그럴듯한 건강검진을 처음 경험했다. 어지간한 아픔으로는 병원에 가지 않는 남편이기에 남편이 병원을 찾을 때엔 병명에 '급성'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1년에 한두 번쯤 사람을 식겁하게 하고 내시경 좀 하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안 듣던 남편인데 드디어 올해 나의 잔소리에 항복하고 제 발로 예약하고 건강검진을 받았다. 관을 들어서는 남편의 손에는 부피가 꽤 되어 보이는 비닐봉지가 들려있었고 그게 뭐냐는 나의 물음에 십이지장 궤양, 용종 2개 제거, 비만 등의 결과를 받았다고 말하는데 남편의 표정이 울상이다. 그런 표정이 된 원인의 8할은 LDL 콜레스테롤 수치였다. 늘 정상범위보다 높게 나오는 수치를 보며 유전이라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작년보다 더 높아진 수치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의사는 약을 권했지만 남편은 일단 체중감소, 식이조절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고 LDL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출 수 있는 방법을 계속해서 찾아보았다. 이게 바로 나와 떡볶이를 먹지 못하게 된 전말이다.


밥 한 공기는 거뜬하던 사람이 다 먹지 않고 남긴다. 냉장고 안 식재료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사람이 양파와 팽이버섯을 찾는다. 우리 집은 어떤 기름을 쓰냐며 묻고는 올리브유를 쓰자고 한다. 출출할 때 간식 창고를 열어보던 사람이 감자나 고구마가 있냐고 묻는다. 얼마 전 오랜만에 찾은 식당에서 시래기 된장국이 나왔는데 "시래기에 식이섬유 많으니까 다 먹어" 하고 남편의 그릇을 봤는데 이미 건더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고기를 먹어도 오리고기를 먹으려고 하고 어느 날은 글,

"소고기 3등급짜리 좀 사주면 안 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어?3등급?내가 투뿔은 못사도 1등급은 사 먹이고 있는데 소고기 3등급이라고?

"자기! 적당히 좀 하자. 정육점에 3등급 소고기를 팔긴 해?


이렇게 신경 써서 먹기 시작한 남편은 실내 바이크도 타고 밖에 나가 뛰기도 하더니 최근 2년간 늘었던 체중이 제자리를 찾았다. 무엇보다 남편의 혈색이 밝아진걸 보니 건강검진하길 참 잘했다 싶다. 다시 혈액검사를 하기까지 추석이라는 고비도 넘겨야 하고 말도 살찐다는 가을의 풍요로움도 견뎌야 하지만 남편은 충분히 잘 해낼 거라 의심치 않는다.

검색해보니 '저지방 소고기'라는 타이틀을 달고 3등급 소고기를 판매하는 곳이 많다. 이번 주말 여섯 끼 중 한 끼는 3등급 소고기 당첨이다! 지금 나의 머릿속엔 냉동실에 예쁘게 누워있는 2인분짜리 떡볶이 키트가 가득하지만 나와 아이들을 위해 건강해지려고 애쓰는 남편을 응원하며 남편이 없는 시간에 맛있다고 소문난 것들을 틈틈이 즐겨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D.P.를 아시나요? (스포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