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었다. 이 아파트를 떠나 이사를 간 그녀가 보고 싶었고 다른 사람 아닌 그녀와의 수다가 그리웠다. 주변에 수다를 나눌 사람들은 늘 있다. 육아 동지인 언니들도 있고 첫째의 같은 반 엄마들도 있고 둘째의 유치원 엄마들도 있다. 매일 오며가며 만나기도 하고 함께 커피도 자주 마시는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허함이 느껴졌다. 특히 올해 새로 사귄 사람들과의 수다가 이어질 때는 피로가 느껴지기도 했다. 말을하기보다는 듣는 편인 나는 경청이라 여기는 그 행위가 불편해지곤 했다. 그래서 더 보고 싶었다. 정말 아무런 불편함 없이 긴장감 따위 바닥에 내려놓은 편안한 수다가 고팠다.
삼척 멤버(삼척 멤버가 등장하는 글 이웃이 떠났다)가 모여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생각이 스친 경우,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어 그대로 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달랐다. 스친 생각을 붙잡으려면 추진력이 필요했고 그 추진력이 바로 발동되었다. 우리 셋 중 나를 포함한 둘은 첫째가 초등학교 1학년인 관계로 한낮의 신데렐라였다.12시까지 학교 앞으로 가려면 문을 일찍 여는 카페가 필요했다. 집 앞에 있는 작은 카페 말고, 편안한 수다를 나누기에 불편한 자리 말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새로운 공기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카페에 가고 싶었다. 몇 분이나 걸렸을까. 금세 옆 동네에 있는 9시에 오픈하는 브런치 카페를 찾았다. 비 예보가 있었는데 사진 속 보이는 창가에 앉아 초록색의 풍경, 토독토독 빗소리, 그저 편안한 공기와 함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평소의 나라면 이 시간에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진 않는데 보고 싶은 그녀의 아이들은 아직 자고 있을 시간이 아니란 걸 알기에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 보고 싶어 전화했다고 답했다. 진짜 보고 싶어서 그런다고 내일 오전에 시간이 되는지 확인하고 방금 찾은 카페를 단톡방에 공유했다.
비가 꽤나 내리는 아침이었다. 아이들을 모두 보내고운전을 자청한 그녀 덕분에 편히 카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커다란 창이 있는 프라이빗한 자리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 앉았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곳이라 곳곳에서 코를 찌르는 페인트 냄새가 났지만 창문을 열었더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한 바깥공기와 함께 더 선명해진 빗소리가 좋았다. 우리 셋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다양한 소재들이 오르내렸고 그중 8할은 육아였으며 나는 고백했다. 작년에 우리가 삼척을 다녀온 게 어떤 말로 표현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이에 뭔가가 있다고 고백했다. 그 말을 전하는데 왜 눈시울은 붉어졌을까. 그리고 그녀들 없이 다른 사람들과 수다라는 것을 떨 때면 불편함을 느낀다고도 고백했다. 그런데 또 다른 그녀도 그렇다고 했다. 공황장애를 겪는 듯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고 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이 최고라고들 한다. 사회 나가서 사람 사귀기는 쉽지 않다고들 한다. 두 말 모두 일리는 있지만 나는 학창 시절 친구들 못지않은 친구들을 사회에서 만났다. 나이로는 나보다 한 살, 두 살 동생이지만 네 살부터 여덟 살까지 딸 하나, 아들 하나 남매를 키우는 육아 동지인 친구들이다. 이 친구들이 그랬다. 언니가 추진해줘서 고맙다고, 비 온다는 핑계로 미뤘으면 언제 이렇게 모였을지 모른다고. 다음에 또 다른 카페를 찾아 다녀오자고도 약속했다. 한낮의 신데렐라 신분이라 수다를 나눈 시간은 2시간이 채 안되지만 내가 원했던 바로 그런 시간이었다. 내가 말할 타이밍과 어떤 리액션을 해야 하는지 생각할 필요가 없는 시간. 에너지가 소모되는 수다가 아니라 에너지가 충전되는 수다 시간. 편안한 수다를 오랜만에 나눴다. 이런 시간이 그립다면, 지금 머릿속에 스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연락해서 만남을 약속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