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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랑 Mar 31. 2022

운전의 쓸모

장롱면허여, 깨어나라.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비를 맞는 건 싫어하지만 실내에서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는 것은 좋아한다. 실내의 범주에 '차 안'이 포함된 건 그리 오래지 않았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집에서는 혼자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없었기에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집을 나섰다. 집 앞 도서관에서 읽어봐야지 했던 책을 빌리고 카페에 들러 챙겨 나온 텀블러에 뜨끈한 커피를  뒤 산 아래 위치한 시립도서관 주차창으로 향했다. 남편 덕에 알게 된 지름길로 빠져나오면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도착시간보다 7분은 단축이 된다. 운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땐 다른 차라도 긁을까 비좁은 길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부러 큰 도로로 돌아다니던 그 골목길이었다.

라디오에선 흥얼거릴 수 있는 대중가요가 흘러나오고 가느다란 빗방울이 차창으로 내려앉는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와 그 비를 연신 쓸어내리는 와이퍼의 조합을 기대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비 오는 날', '혼자'의 분위기를 만끽하기엔 충분하다. 차가 드문 곳에 주차를 하고 운전석 의자를 한껏 뒤로 젖힌다. 창문을 살짝 내리고 텀블러를 집어 드는데 이 오긴 왔구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눈과 귀가 바빠진다.


운전면허는 빨리 따두면 좋다는 말에, 2종 보다는 1종이 더 큰 차를 운전할 수 있다는 말에 스무 살 여름 1종 보통 면허를 땄다. 하지만 그 후로 우리 집에 한 대 있는 차를 내가 운전할 일은 없었다.

장롱면허를 무사고 운전이라며 훈장처럼 지니고 있다가 신혼집에서 차로 5분 거리인 동네로 이사를 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사 오기 직전 둘째가 태어났고 째는 반년만 더 다니면 어린이집 졸업이었다. 장 이 동네에는 첫째 보낼 수 있는 어린이집이 없도 했고 동생까지 보게 된 첫째에게 그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째가 다니던 어린이집은 1세, 4세를 데리고 매일 도보로 왕복하기엔 불편한 거리였고 비나 눈이라도 오면 그대로 집에 주저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아이 둘을 뒷좌석 카시트에 각각 앉히고 심호흡을 몇 번씩 해가며 어린이집을 왕복했다. 아파트 주차장을 내려가다 브레이크 대신 엑셀레이터를 밟았고 드넓은 백화점 주차장을 내려가데도 차 옆구리 드르륵 긁으며 주차를 하다가 주차장 기둥에 쿵 하기도 하는 등 철렁한 순간들이 있었다. 큰 사고는 아니었으니 깜찍한 사건이라 해두자. 몇 번의 깜찍한 사건들을 겪고 나서야 운전이 조금 편해지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하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늘 축축했던 손바닥도 건조한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차를 타야 할 일이 생기면 남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는데 이제는 아무 때고 친정에 가고 마트에 갈 수 있게 되었다. 혼자 아이들을 태우고 먼 거리를 운전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여전히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운전이라는 것이 나의 삶의 질을 한 단계 혹은 두 단계쯤은 올려놓은 건 확실하다.


어제는 자동차를 좋아하는 둘째를 데리고 일산에 위치한 현대 모터 스튜디오에 다녀왔다. 내가 운전을 하지 못했다면 광역버스를 이용해 한 시간 반을 걸려 가야 하는 그곳에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집에서 현대 모터 스튜디오까지는 차로 40거리. 비 예보가 있었지만 지하주차장에서 지하주차장으로의 이동이라 발이 젖는 등의 불편함을 겪을 일 없었다. 나와 둘째는 세 시간의 오붓한 데이트를 하고 돌아왔다.

비가 오면 막아주고 무더운 날엔 시원한 바람을 내어주고 때로는 나에게만 공간을 내어주고 기동력을 갖게 해 준 자동차를 쓸 수 있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시작이었을지라도 장롱면허를 탈출했기 때문이다. 장롱면허를 가지고 있고 주차장에 오래 머무르는 차가 있다면 용기 내라고, 일단 운전 연수부터 시작하라고, 나처럼 당신의 삶의 질도 높아질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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