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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랑 Jul 31. 2022

진짜와 가짜

짜가 아닌 가짜 모습의 나로 상대방을 대해야 할 때에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육아를 함에 있어 나에게는 '역할놀이'가 그랬다. 아프지도 않은데 환자가 되어야 했고 사람인데 공룡이 되어야 했다. 30대인데 두 살 배기가 되어야 했고 진짜 음식이 아닌 가짜 음식을 맛있게 먹는 척을 해야 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처음 몇 분은 진짜 환자인 것처럼 진짜 공룡인 것처럼 진짜 아기인 것처럼 진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역할에 몰입했지만 이내 오래가지 못했다. 에너지는 금세 바닥을 보이고 그 순간 더 이상 진짜인 것처럼 가짜의 모습을 유지할 수가 없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곤 했다.

   

최근 둘째가 일과성 고관절 활액막염 진단을 받고 잠시 유치원과 태권도를 중단한 적이 있다. 예고 없이 둘째와 24시간 붙어 있게 된 나는 진짜와 가짜의 모습을 몇 번이나 갈아 끼워야 했다. 색종이로 세 종류의 비행기를 접었다. 내 것 세 개, 둘째 것 세 개. 총 여섯 장으로 집에서 가장 길게 뻗은 장소를 택해 비행기를 몇 번이고 날렸다. 재미없었다. 격렬하게 혼자이고 싶었지만 '엄마랑 노는 건 재미있다'라고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다리의 움직임을 최소화해야 하는 둘째가 쉴 새 없이 집어 되돌아오는 비행기를 날리고 또 날렸다. 재미없는 놀이를 재미있는 척을 하며 할 수 있는 건 자식을 위한 엄마의 진짜 마음이겠지.

그러다가 진짜의 모습으로 즐길 수 있는 놀이를 찾았다. 한글을 알지 못해도 그림 구별할 수 있으면 할 수 있는 징고와 첫째와 내가 게이머가 되고 둘째에겐 숫자패를 나눠주는 역할을 부여(게이머가 직접 숫자패를 가져가기 때문에 사실은 필요하지 않은 역할)한 루미큐브가 그것이다. 두 게임 모두 규칙이 어렵지 않아 아이들도 쉽게 할 수 있고 승부욕을 발동시켜 성인이 하기에도 매우 적절(루미큐브는 필자가 20대 초반에 직접 구입한 게임)하다. 첫째와 둘째의 비위를 맞춰가며 게임을 이어가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가짜의 모습이 끼어들 틈이 없어 에너지 소진이 덜 하기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할 수 있는 놀이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이럴진대 집 밖에서의 인간관계는 더하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가짜 표정과 가짜 목소리를 꺼내 쓰게 만드는 사람과의 관계는 기어코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깨지고 만 관계를 돌이켜보면 상대방의 이야기는 귀담아듣지 않고 상대방의 말을 끊어가면서까지 본인의 이야기만 늘어놓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가짜의 모습을 하고서라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줄 용의가 전혀 없었을까, 아니면 그 관계가 깨지고 나서야 후회하고 있을까. 쩌면 관계를 깨기 위해 부러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가짜의 모습을 할 필요도 없이 진짜의 모습으로만 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어 다행이다. 아이들 방학을 맞아 그런 사람들과 함께 2박 3일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말없이 앉아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 어떠한 상황에서도 임기응변으로 해결이 되는 관계, 저 깊숙한 곳에 숨겨진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여도 보듬어 줄 수 있는 관계, 무엇을 해도 편안한 사람들과 함께 그 시간들이 새삼 소중하다. 소중하기에 이 사람들과 오래 함께하고 싶은 마음,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그들에게 그리고 그들도 나에게 늘 진짜의 모습만을 보여줄 수 있도록, 이 관계에 금이 가지 않도록 지금의 편안함을 유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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