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가 아닌 가짜 모습의 나로 상대방을 대해야 할 때에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육아를 함에 있어 나에게는 '역할놀이'가 그랬다. 아프지도 않은데 환자가 되어야 했고 사람인데 공룡이 되어야 했다. 30대인데 두 살 배기가 되어야 했고 진짜 음식이 아닌 가짜 음식을 맛있게 먹는 척을 해야 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처음 몇 분은 진짜 환자인 것처럼 진짜 공룡인 것처럼 진짜 아기인 것처럼 진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역할에 몰입했지만 이내 오래가지 못했다. 에너지는 금세 바닥을 보이고 그 순간 더 이상 진짜인 것처럼 가짜의 모습을 유지할 수가 없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곤 했다.
최근 둘째가 일과성 고관절 활액막염 진단을 받고 잠시 유치원과 태권도를 중단한 적이 있다. 예고 없이 둘째와 24시간 붙어 있게 된 나는 진짜와 가짜의 모습을 몇 번이나 갈아 끼워야 했다. 색종이로 세 종류의 비행기를 접었다. 내 것 세 개, 둘째 것 세 개. 총 여섯 장으로 집에서 가장 길게 뻗은 장소를 택해 비행기를 몇 번이고 날렸다. 재미없었다. 격렬하게 혼자이고 싶었지만 '엄마랑 노는 건 재미있다'라고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다리의 움직임을 최소화해야 하는 둘째가 쉴 새 없이 집어 되돌아오는 비행기를 날리고 또 날렸다. 재미없는 놀이를 재미있는 척을 하며 할 수 있는 건 자식을 위한 엄마의 진짜 마음이겠지.
그러다가 진짜의 모습으로 즐길 수 있는 놀이를 찾았다. 한글을 알지 못해도 그림을 구별할 수 있으면 할 수 있는 징고와 첫째와 내가 게이머가 되고 둘째에겐 숫자패를 나눠주는 역할을 부여(게이머가 직접 숫자패를 가져가기 때문에 사실은 필요하지 않은 역할)한 루미큐브가 그것이다. 두 게임 모두 규칙이 어렵지 않아 아이들도 쉽게 할 수 있고 승부욕을 발동시켜 성인이 하기에도 매우 적절(루미큐브는 필자가 20대 초반에 직접 구입한 게임)하다. 첫째와 둘째의 비위를 맞춰가며 게임을 이어가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가짜의 모습이 끼어들 틈이 없어 에너지 소진이 덜 하기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할 수 있는 놀이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이럴진대 집 밖에서의 인간관계는 더하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가짜 표정과 가짜 목소리를 꺼내 쓰게 만드는 사람과의 관계는 기어코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깨지고 만 관계를 돌이켜보면 상대방의 이야기는 귀담아듣지 않고 상대방의 말을 끊어가면서까지 본인의 이야기만 늘어놓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가짜의 모습을 하고서라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줄 용의가 전혀 없었을까, 아니면 그 관계가 깨지고 나서야 후회하고 있을까. 어쩌면 관계를 깨기 위해 부러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가짜의 모습을 할 필요도 없이 진짜의 모습으로만 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어 다행이다. 아이들 방학을 맞아 그런 사람들과 함께 2박 3일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말없이 앉아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 어떠한 상황에서도 임기응변으로 해결이 되는 관계, 저 깊숙한 곳에 숨겨진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여도 보듬어 줄 수 있는 관계, 무엇을 해도 편안한 사람들과 함께한 그 시간들이 새삼 소중하다. 소중하기에 이 사람들과 오래 함께하고 싶은 마음,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그들에게 그리고 그들도 나에게 늘 진짜의 모습만을 보여줄 수 있도록, 이 관계에 금이 가지 않도록 지금의 편안함을 유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