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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랑 Jul 20. 2022

마음고생

옆 동네로 이사 간 육아 동지를 두 달여 만에 만났. 그녀는 우리 집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나를 살다.

"언니, 왜 이렇게 야위었어?"

"그래 보여? 야윌 일이 없는데...... 야식을 끊어서 그런가? 아, 마음고생해서 그런가 봐."

"무슨 일 있었어? 나도 마음고생했는데 왜 나는 그대로지?"

마. 음. 고. 생.

우리는 이 한 마디로  본 사이 각자의 첫째와 있었던 일들을 줄줄이 늘어고 공감하고 위로하며 다.




최근 들어 일들이 한꺼번에 밀려온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하얀, 이제 다시 일할 때 되지 않았어?' 하는 취업 제의를 연달아 받았고 전 직장 동료의 암 투병 소식과 또 다른 동료의 부고 문자, 친구의 유산 소식(친구의 임신)을 며칠 사이 들어야 했다. 이런 일은 한꺼번에 오지 않아도 되는데...... 그들의 일이 마치 내 일인 것 마냥 '슬프고, 안타깝고, 무섭고' 같은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들을 하루하루 느끼며 안한 날들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첫째의 도둑질 사건(너의 도둑질 그리고 거짓말)이 터졌고 며칠 지나지 않아 카페에 마주 앉은 동네 언니가 기분 나쁘게 듣지 말라며 조심스럽게 첫째에 대한 불편함과 염려를 전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첫째 담임 선생님의 전화까지 받고 나니 다른 사람으로 인해 느꼈던 슬픔, 안타까움 등의 감정은 저 멀리 달아나고 첫째에 대한 실망과 지난 만 8년간 해온 육아에 대한 허무함이 물 밀듯 밀려왔다. 고작 아홉 살인 녀석 때문에 멘털이 탈탈 털리는 일을 마주하고 보니 언제 닥칠지 모를 첫째의 사춘기에 대한 두려움도 온몸을 휘감았다.


늘 똑 부러진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첫째였다. 부족하기만 한 엄마 밑에서 잘 자라주고 있어 그저 대견한 첫째였데 그 부족함 탓이었을까, 첫째에 대한 지나친 믿음 때문이었을까? 안 그래도 첫째의 말투와 행동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 지 몇 달 째였고 그것의 교정을 위해 끊임없이 훈육하고 있던 참이었다. 쉽게 교정되지는 않았지만 집이라서 그런 거겠지 밖에서는 안 그럴 거야 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엄청난 실수였다. 고민을 거듭하다 나에게 일러준 동네 언니와 두 달여를 지켜보다 전화를 걸었다는 담임 선생님의 첫째에 대한 지적은 내가 하고 있던 지적과 무섭게 맞아떨어졌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줄줄 새고 있었다.


첫째와 마주 앉았다. 내가 들은 것들을 토대로 질문을 이어갔는데 상당수 기억을 못 하기도 했고 자기는 그런 적이 없다고 억울해하기도 했. 동네 언니의 말도 담임 선생님의 말도 내 아이의 말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첫째 앞에서 만큼은 엄마는 무조건 너를 믿는다며 타일렀다. 너의 행동으로 상처받는 친구들이 있어, 지금까지는 그게 잘못된 행동인지 몰라서 그랬다면 이제는 알았으니 그러면 안돼, 앞으로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봐 등의 말들을 고심하며 뱉어냈지만 첫째가 벌써 아홉 살이 아니라 고작 아홉 살임을 되새기고 요동치는 감정을 가라앉히는 데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에게나 터놓기 힘든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꺼내 보여줄 수 있는 육아 동지가 있어서, 손녀 때문에 힘들어하는 딸이 걱정돼 나가서 놀다 오라며 휴일에 기꺼이 손주들을 봐주시는 엄마가 계셔서, 아이 문제에 언제나 진지하게 의견을 나눠주는 남편이 있어서 다행이다 싶은 밤. 그들 덕분에 무기력한 자세로 자책하던 시간들을 떨쳐낼 수 있었다. 여전히 두려움은 존재한다. 지금은 그저 귀여운 정도에 불과하고 해를 거듭할수록 힘겨운 일들이 더 많아질 거라고 하니 길고 긴 레이스에서 포기만은 하지 말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에게 당연한 게 첫째에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간 만들기 참 힘들다 느끼지만 그 몫은 누가 뭐래도 내 차지라는 것을, 반복해서 실수하더라도 반복해서 가르쳐야겠다는 것을, 무엇보다 육아에 있어서 만큼은 긴장의 끝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예고도 없이 마음고생은 또 찾아올테니까.

심란할 땐 올려다보며 사진 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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