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퇴사 후, 떠난 호주 여행에서 (2)

2. 낯선 도시에서 만난 익숙한 나

by hayden

혼자 보내는 시간은 생각보다 빠른 듯했다.

기절했다 깨어난 듯한 밤을 보내고 날이 좋다는 핑계로 아침 일찍 본다이비치로 떠났다.


처음 타보는 시드니 버스, 붐비는 사람들 사이 내가 유일한 동양인임을 자각하곤 대수롭지 않게 스탠딩 좌석으로 향했다.

밖의 풍경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매번 정차하는 정류장마다 밀려오는 사람들을 피하느라 잠기는 생각에서 헤어 나오길 반복했다.


지난밤 식사량이 풍부했던 탓에 아침 일찍부터 배가 고파왔고,

나는 버스 안에서 급히 목적지를 베이글집으로 수정했다.

온통 머릿속엔 베이글 생각뿐이어서 30분 동안 서있는 다리가 아플 새도 없이 구글리뷰를 보며 어떤 메뉴를 먹을지 고심할 뿐이었다.


마침내 도착한 본다이비치는 생각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럼에도 금강산도 식후경이지 않은가. 베이글집에서 급히 에그마요 베이글과 콜드브루를 주문했다.

외부 좌석에서 한입에 들어가지도 않는 베이글을 욱여넣었고, 반개를 채 먹지 않았지만 금세 배가 찼다.

남은 베이글은 로망 있게 비치에서 먹겠노라 다짐하고 take away box에 베이글을 담아 나는 또다시 본다이비치로 향했다.


평일 이른 아침 본다이비치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가져온 돗자리를 야무진 자리에 피곤, 따스한 햇살 아래 일광욕을 하며 책을 읽었다.

햇살이 따가운지도 모른 채 열심히 책을 읽다 바닷가를 보길 반복했다.


그러다 책에 한창 빠져있을 때 웬 잘생긴 외국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Do you have an instagram?”

뜬금없는 의문문에 말을 되물었는데, 갑자기 나보고 cute하다며 그는 대뜸 주절주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Tourist 냐는 질문에 맞다고 하자 여긴 전부다 Tourist 라며 웃음을 지으며 이곳에 며칠 동안 묵냐고 물었다.

생각 없이 7일 정도 된다며 함께 웃어 보였지만, 대뜸 그는 남은 시간 동안 바쁜 스케줄이냐고 물었다.

(외국인은 처음이지만(?) 아마도 데이트 신청을 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잠시 생각하다, 거절할 마음으로 바쁜 스케줄일 것 같다고 대답했고, 그는 멋쩍었는지 그저 내가 cute해서 물어봤다는 이야길 남긴 채 떠났다.

잠시동안 나의 짧은 영어 실력을 탓하곤 인스타그램이라도 줄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한동안 했다.

(좀 웃긴 얘기지만, 생각보다 얼굴이 잘생겼고 내 스타일이었다.)


짧게나마 재밌었던 에피소드를 겪곤 그래,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무슨 외국인이냐 하며 포장해 온 남은 베이글을 꺼내 입에 넣으며 아쉬움을 책으로 달랬다.

그렇게 식사를 하며 잠시 둘러본 내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자리해 있었다.

새삼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자각한 뒤,

나는 곧장 돗자리를 접었고, 아이스버그 수영장을 보기 위해 해안가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처음에는 구글 지도를 켜서 따라가길 반복했지만, 누가 봐도 저 멀리 보이는 해안가 끝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음을 보곤, 저곳이 본다이비치구나! 싶었다.

그리곤 경치를 구경할 틈도 없이 수영장 앞에 도착했다.


위에서 보이는 절경은 마치 잡지의 한 페이지에 실릴법한 광경이었다.

이른 시간 때문인지 파도 근처의 수영장에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빈 수영장 위로 올라오는 매력적인 파도들이 때로는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여유롭고 때론 날카롭게 치는 파도를 온전히, 그리고 충분히 감상했고,

완전히 담을 수 없는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다양한 사진을 핸드폰에 남겼다.


아이스버그를 따라 이어지는 해안가 산책코스가 있음을 오래전 블로그를 통해 본 적이 있다.

문득 그 사실이 생각났고, 나는 곧장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생각보다 긴 코스가 펼쳐졌고, 나는 걷다 잠시 뒤를 돌아 경치를 구경하길 반복했다.


그렇게 내가 감상에 빠져있을 때 즈음, 한 여자 외국인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Can you take picture?”

나는 바로 Sure이라고 대답했고, 그녀는 주절주절 본인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녀는 프랑스 사람이고, 혼자 여행을 하러 이곳에 왔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TMI에 당황한 나는 정말 멋지다는 인사를 건넨 뒤, 한국인답게 최대한 열성을 다해 사진을 찍어줬다.

그리곤 나도 한 장 찍어 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자, 그녀는 나와 똑같이 Sure으로 대답을 대신하고서는,

어디에서 왔냐고, 그리고 혼자 여행하는 중이냐고 물었다.

나는 한국인이고 나도 그녀와 같은 처지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사진 찍는 게 너무 어렵지 않냐면서, 오늘도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며 내게 한탄을 늘어놓았다.

충분히 공감된다며 나는 곧장 그녀가 찍힌 위치에 서서 포즈를 취했다.

그녀는 옆에 있는 건물이 맘에 안 든다며 사진을 다양한 각도로 한참을 찍어줬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사진과 thank you, 그리고 enjoy 인사를 건넨 뒤, 이따금 미소를 지으며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 덕분에 잠시나마 웃음을 지을 수 있었고, 내가 온전히 나온 사진을 건질 수 있었다. 비록 몸과 다리가 1:1 비율로 찍혔지만 말이다. (외국인에게 사진을 기대한 내 잘못도 있다.)


그렇게 산책 코스를 지나고 지나, 또 다른 비치를 발견했다.

새로운 느낌의 비치였지만, 딱히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본다이비치의 멋을 되뇌며 나는 또다시 본다이비치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그렇게 산책로를 거의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걸으며 조금은 지쳐 시원한 무언가가 땡기기 시작했다.

나는 곧장 아사이볼을 먹으러 근처 유명하다던 아사이볼집으로 향했다.

내가 찾는 음식점들은 보통 한국인들의 후기가 좋은 곳이기에, 이곳에서도 역시 내 뒤에 한국인 여자 세 명이 줄을 섰다.

함께 여행 온 친구들처럼 보였는데, 새삼 그들의 수다 소리에 고독보단 함께하는 추억도 괜찮았겠다는 생각을 잠시동안 했다.


그렇게 나는 아사이볼을 시켰고, Hayden이라는 이름을 오랜만에 꺼냈다.

직원은 내 이름을 부르며 아사이볼을 건네주었고, 나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아사이볼을 먹으며 책을 꺼내 마저 읽었다.

짬을 내서 읽는 책이 훨씬 더 집중도 있게 읽히는 기분이 드는 것은 돌연 오늘 뿐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한참 아사이볼과 책을 즐겼고, 약간 선선해진 몸에 또다시 햇살을 채우고 싶어, 또다시 본다이비치 모래사장으로 향했다.


되돌아가 본 본다이비치는 사람으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비키니를 입지 않고 꽁꽁 싸맨 나만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나는 꿋꿋하게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펼쳤고, 다시 책과 햇살에 온전히 집중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소음 속에서 집중력은 생각보다 빠르게 깨졌고, 그런 나는 또 다른 도파민인 가족 찬스를 쓰기로 결심했다.

엄마한테 추천받은 노을을 볼 수 있다는 쿠지비치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 본다이비치에서 호주에서 유명하다는 치킨 파미를 먹으러 향했다.

아빠의 호주 외국인 친구가 추천해 준 음식인데, 근처에 먹을 곳이 있다고 하여 예정에 없던 음식점에 방문했다.


페일에일 한 잔과, 치킨 파미를 시키고 곧바로 건네준 페일에일을 홀짝이며 음식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갑자기 오는 통증에 문득 내 양쪽 팔이 빨갛게 탔음을 자각했다.

머리끈이 있던 오른쪽 손목에는 머리끈 모양대로 살이 탔고, 잠깐 거울을 보곤 빨개진 코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가 코를 만지는 습관이 있어서 그런지 코에 바른 썬크림만 지워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여분의 썬크림을 챙겨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체념과 동시에 나온 모짜렐라가 올라간 슈니첼, 치킨 파미를 보며 에라 모르겠다를 시전 하며 빨개진 코로 음식 냄새를 흡입하며 그 누구보다 맛있게 식사를 마무리했다.


쿠지 비치에 가는 버스를 타기 전, 잠깐 들린 잔디밭에 앉아 우스꽝스러운 빨간 코를 기념하며 사진을 한 컷 찍었다.

마지막으로 보는 본다이비치의 풍경을 뒤로하고 나는 버스 시간에 맞춰 쿠지비치로 향했다.


도착한 쿠지비치는 생각보다 번화했다.

버스킹을 하고, 그 앞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해안가를 따라 걷다 보니 여기도 아이스버그 수영장과 비슷한, 어쩌면 누가 따라 했을지도 모르겠는 희한한 사우나 같은 공간이 있었다.

사람들이 꽤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머리만 내놓고 사우나, 혹은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 옆에 비치에서는 파도가 굉장히 강하게 쳤다.

아마도 이 비치가 서핑의 성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저 끝에서 누군가가 서핑에 성공해 파도를 꽤나 오래 타는 모습을 목격했다.

직접 두 눈으로 누군가가 서핑을, 그것도 제대로 되게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실제로 그 모습을 보니 아름답고 멋지게만 느껴졌다.

영상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한 채 급하게 카메라를 들었는데,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던 약 5분 동안 아무도 파도를 제대로 타지 못했다.


나는 큰 아쉬움을 뒤로한 채, 서핑하는 모습이 잘 보이는 바닷가에 돗자리를 펴서 앉았고,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길 반복했다.

겁이 많은 내게 서핑이란 너무 무서운 종목 중 하나였는데, 덮칠듯한 파도를 즐기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서핑은 도전하는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종목인 것임을 깨달았다.


한동안 바닷가를 보다 문득,

‘대체 그 멋지다는 노을은 어디서 볼 수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해는 바다 반대편으로 지는데..’

라고 생각하던 순간 나는 쿠지 비치 끝에 보이는 푸르른 언덕을 보았다.


사람들로 가득한 그 언덕을 보며 왜 저기에 사람이 많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유레카! 그들은 그 높은 언덕에 반대편으로 지는 노을을 보러 갔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급히 돗자리를 접어들고 그 언덕으로 홀린 듯 향했다.

언덕에서 본 절경은 그야말로 끝내주었다.

왼편에는 쿠지비치, 그리고 오른편에는 노을이 있는 광경을 보며 새삼 자연이 주는 웅장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나는 북적이는 사람들 속, 두 경치가 함께 보이는 언덕 뒤편에 자리를 잡았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노을을 두 눈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노을을 구경하고 사진에 담기를 반복하는 것도 잠시, 앞에 앉아있던 외국인 여자 4명이 갑자기 줄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주변에 아기도 있었던 터라 인상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눈치도 없는 그들은 담배를 거의 돌아가면서 피기 시작했고, 노을이 끝나갈 때 까지도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것도 잔디밭에서 말이다!

나는 노을이 지고 나서 바로 돗자리를 접어 일어섰고, 불쾌한 기분을 반대편에 보이는 붉은 하늘을 보며 달랬다.

옆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나의 로망 잔디밭 요가를 노을과 함께 즐기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합류하고 싶었지만, 아쉬운 대로 그 광경을 사진으로 담아 고이 간직했다.


언덕을 내려오자, 주변이 어둑어둑해져 빠르게 숙소로 향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버스 정류장 건너편 맥도날드는 나를 부르기에 충분했고, 나는 소프트콘을 하나 들고 버스정류장에서 숙소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렸다.


추억은 반복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 나는 오늘도 무탈히 숙소에 도착했다.

나와 같은 층에 머무르는,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문신을 한 착한 외국인 아저씨의

“I love your shoes!”라는 TMI와 함께 말이다.

(본인이 좋아하는 래퍼가 Superstar 신발을 신는다며 주절주절 스몰톡을 이어나가는 그를 보며, 새삼 호주의 스몰톡 문화를 본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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