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에게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되길
우리 집안은 아주 전형적인 경상도 집안이다. 요즘은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고들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은 옛날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내 친구들을 봐도, 그리고 직장 동료 선후배들을 봐도 요즘 시대와는 동떨어진 우리 집안을 볼 때마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잠깐 우리 집으로 놀러 가 보자.
명절 연휴에는 무조건 큰집에서 명절 당일을 보내야 한다. 우리 집이 큰집이었기 때문에 설날, 추석 당일에는 사촌에 육촌까지 우리 집으로 모였었다. 한때는 대략 30명 정도의 일가친척들이 모이곤 했었다.
사촌에 육촌까지 모이게 되면, 어르신들께서 족보 정리를 해주신다. A는 할아버지 형제의 아들의 자식이니까 너랑은 육촌의 관계이고, B는 아버지 형제의 자식이니 사촌의 관계이다라는 등 정작 당사자들은 궁금해하지 않은 정보들을 아주 상세히 설명해주곤 했었다.
하지만 코로나를 기점으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큰집이 아닌 사촌에 육촌들은 코로나 이후부터 명절에 우리 집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이제부터 본인들이 직접 제사를 지내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더 이상 명절 연휴라는 꿀 같은 휴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집은 큰집이지 않은가. 가문의 장손이기 때문에 쉬이 전통을 손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는 명절 연휴가 되면 할머니, 우리 가족들, 아버지 형제내외분, 이렇게만 모이게 되었다.
우리 집안은 경상도 집안에서도 아주 전형적인 경상도 집안인 것이다.
유년시절을 되돌아보면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는가?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질 못하겠다.
초등학교 이전의 기억은 이제 거의 없다시피 하고, 초등학교 때에는 아버지 사업으로 인해 전학을 2번이나 갔었다. 부산에서 하동, 하동에서 진주로 이사를 가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해야만 했다.
97년 IMF로 인해 아버지 회사는 부도가 났고, 어머니가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학습지 교사를 하셨다. IMF 때문에 다른 회사에 취업을 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1년간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시며 미래를 준비하셨다.
학창 시절 부모님과 같이 밥을 먹은 기억이 많이 없는 것 같다. 평일 저녁에는 라면을 끓여 먹거나 식빵에 딸기잼을 발라먹었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주말에는 부모님과 같이 밥을 먹었는데, 밥 먹을 때는 밥만 먹어야 한다며, 음식을 먹을 때는 짭짭거리는 소리를 내면 안 되며, 반찬을 먹을 때는 뒤적거리지 말라는 등 식사 예절을 배우느라 가족 간의 대화가 낄 틈이 없었다.
우리 집은 꽤나 엄격한 편에 속했었던 것 같다. 예의범절을 중요시했고, 말투와 행동거지 하나하나 지적받으며 자랐다.
이제는 왜 그렇게 자식을 키우셨는지 십분 이해가 된다. 맞벌이로 많은 시간을 함께 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일부러 더 엄하게 훈육을 했던 것이다. 곁에서 항상 지켜줄 수가 없기에, 자식이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부모님 덕분에 사회생활을 하는 데 많은 부분이 도움이 되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건, 사소한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몸에 베여있었기 때문에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거의 전무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구나 라는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나에기 늦게 다가왔다. 대략 20년쯤 후에 찾아온 것이다.
나에게 있어 부모님의 사랑을 정의하면,
“남에게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 마음“
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도 부모님과 살갑게 얘기하는게 어색하다. 아니, 아직도 부모님과 마주앉아 대화를 하는게 어색한 것이다. 내가 마음의 문을 먼저 열어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