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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트라떼 May 18. 2018

2-9. 파란색이 좋아서, 조드푸르

김종욱 없음

 라자스탄 주에 위치한 조드푸르(Jodhpur)는 상당수의 집 외벽이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어 블루 시티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영화 <김종욱 찾기>의 배경이 된 도시로 더욱 유명하다.  

 

 내가 인도에 간다고 말했을 때 친구들은 김종욱을 찾아오라고 했다. 여행 중에 만난 한국인 여자 여행자들 중에서도 김종욱을 찾아서 가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 이상 그 영화를 봤는지 안 봤는지와는 상관없이, 그리고 정말 여행지에서 연인을 찾아가겠다는 생각으로 온 건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김종욱을 찾겠다는 문장 자체가 인도의 한국인들 사이에서 이제는 일종의 관용구가 된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런 표현을 써 본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사실 내가 조드푸르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김종욱보다는 파란색 때문이었다. 파란색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다. 라피스 라줄리(Lapis-lazuli)라는 보석이 있다. 짙은 파란색 보석으로 청금석(靑金石)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파란색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이 라피스 라줄리를 모으는 취미가 있다.  

 태국 방콕의 한 미술관에서 캔버스가 온통 짙은 파란색으로 뒤덮여 있던 이름 모를 작품을 30분이 넘게 앞에 서서 멍하니 바라보았던 적이 있다. 파란색, 특히 검을 정도로 짙은 파란색을 보면 나는 마치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바다를 마주한 것처럼,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올라오곤 했다.  


 파란색이 좋으니까, 그래서 조드푸르에 갔다. 시작은 언제나 그렇게 단순하고 쉬웠다. 그동안 함께 여행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당일치기를 하고 델리 등 다른 도시로 이동하거나 1박 정도만을 머문 이곳에서 나와 일행은 3일을 보냈다.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딱히 했던 것은 없었다. 해가 뜨면 숙소에서  밥을 먹고 밖으로 나가서 온통 파란색인 골목길을 걷고 또 걷는 것이 전부였다.  


 

이곳은 유독 아이들이 많은 도시이기도 해서, 골목길을 지나 또 다른 골목길로 들어서면 어디에나 길거리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은 우리에게 할로, 꼬레아?, 원 루피, 포토 포토라고 말을 걸며 짓궂게 쫓아오곤 했다. 나는 세상 물정 모르고 순수하기만 할 것 같은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원 루피라는 단어를 싫어했다. 마음이 무거워서 아이들을 피해 다녔지만 어디에도 그런 아이들이 없는 곳은 없었다.  


조드푸르에 있는 인도에서 가장 큰 요새인 메헤랑가르 요새(Meherangarh Fort) 맞은편에는 선셋 포인트가 있는데 이곳에서 보는 일몰이 장관이다. 말이 선셋 포인트지 제대로 된 전망대는 아니고 거대한 바위 덩어리 위에 올라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이미 조드푸르에 다녀갔던 사람들이 말해주어 알게 된 곳이다. 가는 길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골목길을 따라 걷다가 계단을 한참 올라갔던 것 같다. 바위 위에서 본 해 질 녘 조드푸르는 정말 아름다웠다. 사실 상당수 집들이 파란색으로 외벽을 칠한 것은 맞지만, 그렇지 않은 집들도 많았기 때문에 온 세상이 전부 파란색인 풍경을 기대하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듬성듬성하지만 어디를 보아도 파란색이 있었고, 우리가 올라갔을 때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마치 이 도시에는 파란 집들과 파랗지 않은 집들과 여행자인 우리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붉은 저녁노을에 파란색이 점점 꺼져가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파란색을 좋아하는 나에게 조드푸르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선물 같은 곳이었다.  


선셋 포인트에서 바라 본 조드푸르





  많은 인도 숙소들은 식당을 겸해서 운영하고 있어 숙박객과 외부인들에게 음식을 판다. 우리 숙소에도 식당이 있었고, 숙소에서 음식을 팔면 어느 정도는 그곳에서 사 먹는 것이 암묵적인 관습이었기 때문에 매 끼는 아니지만 가끔 숙소에서 밥을 사 먹곤 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소 눈망울을 가진 우리 숙소의 요리사는 너무나 착했지만 요리를 정말로 못한다는 것이었다. 웬만하면 아무 거나 잘 먹는 나조차도 그의 음식은 견디기 힘들었다. 한 술 더 떠 그 착한 요리사는 맛없는 음식을 내놓고서는 밥을 먹는 우리에게 5분이 멀다 하고 와서 맛이 어떤지 물었다. 어쩔 수 없이 맛있다고 대답하면 그제야 만족하고 맛있게 먹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주방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5분이 지나면 나타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한 번은 다른 숙소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간 적이 있는데 음식이 아주 저렴하고 맛있었다. 하지만 맛없는 음식을 만들어 놓고서는 5분마다 찾아와 맛있냐고 물어보는 뻔뻔한 요리사가 나는 금방 그리워졌다.  


 

조드푸르에서 보낸 3일은 무척 편안해서 걱정거리라곤 원 루피를 외치며 쫓아오는 아이들을 어떻게 피할지와 오늘은 우리 착한 요리사의 밥을 또 어떻게 먹어야 할지 하는 것 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12월 31일 전에 바라나시에 도착해 1월 1일을 갠지스강에서 맞이하고 싶었던 나는 며칠 만에 정이 많이 들어버린 조드푸르를 떠나기로 했다.  

 숙소 주인은 떠나는 날 인도 답지 않게 숙소비 영수증을 봉투에 담아서 주었는데 꽃이 그려진 노란 편지 봉투 겉면에는 'Wish you happy journey, Thanks.'라는 짧은 인사말이 손글씨로 쓰여 있었다. 김종욱이 없어도 조드푸르는 충분히 따뜻한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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