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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인도 안의 작은 티베트, 다르질링

인도에서 우리와 닮은 사람들을 만나다.

by 오트라떼

인도 히마찰 프라데시 주의 다람살라(Dharamshala)라는 지역에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들어서 있다. 그리고 내가 콜카타에서 도망쳐 올라간 북동부 서벵골 주의 다르질링(Darjeeling)은 공식 망명정부는 아니지만 여전히 많은 티베트 난민들이 살고 있는 도시로, 마치 인도 안의 작은 티베트와 같은 곳이다.


바라나시에서 다르질링으로 갈 때는 뉴잘패구리(New Jalpaiguri) 역까지 기차로 약 15시간을 이동한 후 그곳에서 지프를 타고 다시 3시간 여를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5월의 콜카타의 기온이 약 30~40도 정도로 무더웠다면, 해발 2,200미터의 고산 지대에 위치한 다르질링은 해가 가장 뜨거운 한낮에도 20도 내외를 유지했다. 아침저녁으로는 체감 온도가 더욱 떨어져, 따뜻한 옷 한 벌도 없이 올라갔던 나에게는 상당히 추운 날씨였다.


바라나시에서 뉴잘패구리까지 가는 기차는 인도에서 처음 타는 기차였는데 여행객들이 보통 가장 많이 이용하는 슬리퍼칸을 이용했다. 슬리퍼칸의 한 칸에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의자 겸 간이침대가 각각 3층씩 양쪽에 총 6개가 놓여있는데 보통 낮시간에는 양쪽 윗 두 침대를 접고 가장 아래층 의자만 남겨놓아 모두 앉아서 가고 밤이 되면 침대를 펴서 누워서 자면서 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보통 인도 기차의 슬리퍼칸은 에어컨도 나오지 않고 위생 상태도 그리 좋지 않지만 콜카타에서 침대에 걸터앉기만 해도 온몸이 간지러워지는 끔찍한 숙소에서 지냈던 나에게는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돌아다닐지언정 적어도 몸이 간지럽지 않은 슬리퍼 기차는 천국과도 같았다. 콜카타 숙소에서 자지 못한 잠을 이날 야간 기차 안에서 다 잔 것 같다. 누가 슬리퍼 기차를 더럽다고 했는가, 그날 나에게 기차는 너무나 깨끗하고 안락한 최고의 공간이었다.


이날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여행 중인 방글라데시에서 온 80살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여든 살의 나이에도 친구들과 여행을 할 수 있는 체력과 열정이 대단해 보였다. 기자였던 할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부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며칠간 온 적이 있다고 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일이었을 거라며 당시 서울에서 받은 좋은 인상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는데 여행은 이렇게 접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80살 할아버지와 한국의 20대 대학생을 하나의 울타리로 엮어주기도 한다는 생각에 어쩐지 뭉클하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뉴잘패구리역에서 지프를 타고 다르질링까지 올라가는 길은 꼬불꼬불한 산길의 연속이었다. 나는 두 번째 여행에서도 다르질링에 갔었는데 두 번의 다르질링 방문에서 총 4번을 이 지프를 타고 오르내리는 동안 멀미를 하다가 결국엔 토 하는 사람을 두 번 보았다. 심지어 인도 아주머니 한 분은 차 안에서 닫힌 창문을 향해 토했고 승객이 많아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로 3시간을 달려야 했던 차 안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인도에서는 도시 하나를 이동하면 완전히 다른 나라, 다른 세계가 나타난다.
이것이 인도의 매력이었다.



지프가 뉴잘패구리에서 멀어져 감에 따라 풍경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창문이 닫힌 지프 안에서도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공기를 통해 바깥 기온이 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우리와 닮은 티베트 사람들이 거리에 많아지고 있었다. 무척 더워서 반팔을 입고 다녔던 콜카타와 달리 사람들의 옷이 점점 두꺼워지고 있었다.

지프에서 내리자, 고작 하룻밤을 기차로 달려왔고 3시간을 지프로 올라왔을 뿐인데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것 또한 인도의 매력이었다. 한국에서는 서울과 제주도가 물론 제각각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누가 봐도 같은 한국인 것과 달리 인도에서는 도시 하나를 이동하면 완전히 다른 나라, 다른 세계가 나타난다.


숙소가 밀집되어 있는 초우라스타 광장 인근까지 이동하는 길은 대부분 오르막길이었는데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오르느라 체력적으로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반대방향에서 내려오는 교복을 입은 티베트 학생들이나, 콜카타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상점들을 보면서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광장이었다.


우리는 광장 인근에서 묵을만한 숙소를 찾으려고 했지만 대부분의 괜찮은 숙소는 모두 만실이었다. 알고 보니 인도 내에서도 유명한 휴양지인 다르질링은 4월에서 6월 사이가 성수기라고 한다. 길거리에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한 한국인 남자가 다가와 혹시 숙소를 찾고 있느냐고 물으며 자신의 숙소가 꽤 괜찮은데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아서 방이 많이 남아 있다고 같이 가겠느냐고 했다.

사실 이 친구는 전날 밤 바라나시에서 뉴잘패구리로 넘어오던 슬리퍼 기차에서 내 반대편 침대에 있었는데, 능숙한 영어로 서양인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한국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이 친구, J와는 이후 네팔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일정이 달라 헤어졌지만 네팔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래킹을 하면서 다시 마주치고 또 인도 바라나시에서도 다시 만나 남은 여행의 일부를 함께 했었다. J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콜카타를 통해 인도에 입국했는데 인도 여행이 처음이라 잘 모르고 여행자 거리 서더 스트릿이 아닌 다른 지역에 숙소를 잡았고 하필 공항에서 나온 시간이 새벽이라 어두운 인도 밤거리를 혼자 걷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콜카타가 너무 무서웠다고 우리와 같이 여행하고 싶다는 J가 자신이 느낀 두려움을 오롯이 털어놓는 모습이 내 눈에는 외려 용기 있어 보였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에서 보이는 다르질링 전경
윗사진의 풍경은 안개가 심한 날에는 이렇게 변한다. 그리고 우리가 머물렀던 날의 대부분은 이랬다.


나는 언제 내 감정에 저렇게 솔직했던 적이 있었던가,
이제부터라도 솔직한 여행을 하고 싶다.


사실 나는 콜카타 빅토리아 메모리얼에서의 사건만 빼면 대체로 경계심이 많은 여행자에 속했다. 겁이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겁먹은 것을 티 내서 사기꾼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마치 전투에 임하는 전사 같은 마음으로 비장하게 여행에 임했었다. 특히 3개월 간 떠난 두 번째 여행에서는 더욱 그랬는데, 나는 거의 인도인들과 싸우러 여행을 갔나 싶을 정도로 모든 인도인들을 경계하고 의심했었다. 내 안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용기 있는 척해야 했던 내 모습을 J를 보며 돌이켜 보았다. 나는 언제 내 감정에 저렇게 솔직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래, 그럼 이제부터라도 솔직한 여행을 해보자.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울고 사기당할 때 당하더라도 그래도 조금은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을 더 들어보고 아주 조금은 더 믿어보자, 그렇게 다짐했다.


콜카타에서 다르질링으로 넘어오면서 체감온도가 왕창 떨어진 탓에 감기 몸살에 걸리고 말았다. 다르질링에 도착한 날 밤에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초우면을 먹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비를 맞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어쩌면 그것도 한몫했을지도 모르겠다. 다르질링에서는 4일을 보냈는데 그중 3일은 발열, 오한, 설사, 두통, 콧물, 복통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증상들이 겹쳐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일행들은 부지런히 구경을 다니는데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숙소 침대에 누워서 보냈다. 옷을 몇 겹이나 껴입고도 모자라 시장에 가서 한국에서는 입지도 않던 기모 레깅스를 사 입었고 같은 방을 쓰던 H언니가 나가고 없을 땐 언니의 침낭까지 덮고 잠을 자곤 했다.


29893303885_67cca39cca_o.jpg 티베트 전통 음식 땜뚝(Thenthuk), 우리나라의 수제비와 비슷한 맛이다




29893306835_247f973b50_o.jpg 구름 너머로 보이는 칸첸중가. 사진을 찍는 짧은 순간 동안에도 빠르게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해서, 금세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르질링에서는 높이 8,586m로 세계 제3봉이라는 칸첸중가(Mt Kanchenjunga)를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있던 4일 동안은 안개가 심해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그래도 그 와중에 늘 새벽 일찍 일어나 동네 산책을 나가던 부지런한 J가 3일째 되는 날 아침, 날이 개어 칸첸중가가 보인다는 소식을 안고 숙소로 돌아왔고 우리는 산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나 역시 아픈 몸을 이끌고 나갔는데 난생처음 본 설산의 위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장엄하고 감동적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해 칸첸중가는 안갯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칸첸중가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르질링에서는 바로 네팔로 넘어가 히말라야 트래킹을 하기로 했었는데 칸첸중가를 보면서 앞으로 하게 될 트래킹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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