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오르다.
인도 여행기이지만 중간에 트래킹을 위해 2주간 들른 네팔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인도 다르질링에서 까까르비타 국경을 통해 육로로 네팔로 넘어가는 길을 택했는데 일행 네 명 중 H언니와 J는 국경에서 카트만두로 떠났고, 나와 다른 일행 한 명은 포카라행 버스를 탔다. 하지만 가이드북을 너무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분명 까까르비타에서 포카라까지 12시간이 걸린다던 버스는 정확히 21시간이 걸려 다음날 오후에서야 포카라에 도착했고, 우리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서야 버스(심지어 여행자 버스도 아닌 비좁은 로컬 버스였다.)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날이 좋지 않아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중간에 비가 왔고 낡은 버스에서는 비가 샜다.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빗물을 피하고 싶었지만 의자가 좁아서 몸을 편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버스는 어찌나 잔고장이 많이 나던지 밤 11시경, 모래가 많은 곳에 타이어가 빠져 결국 빠져나오지 못하고 모두 내려 트랙터를 가져와서 버스를 꺼내야만 했는데 그 과정이 한 시간 이상 걸렸었다.
그러나 버스에서 모두 내리라고 해서 내린 그 순간, 나는 가로등 하나 없는 네팔 시골 마을의 나무들이 온통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 거리는 광경을 보았는데 처음에는 바보처럼 정말 크리스마스트리인가 싶다가 뒤늦게서야 그것이 반딧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태어나서 처음 본 반딧불이인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기까지 했고, 게다가 밤하늘에는 별도 가득했다. 내가 어디에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황홀한 광경이었다. 멋도 모르고 포카라행 로컬 버스를 탄 덕분에 고생은 했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도 볼 수 있었다.
트래킹을 할 때나 일출을 보러 올라갈 때는 앞으로 펼쳐질 풍경에 대한 기대를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은 그런 풍경을 보는 것도 목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버스에서의 그날 밤은 달랐다. 흔들거리는 버스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녹초가 되어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나를 찾아온 반딧불이와 밤하늘은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고된 여정 끝에 도착한 포카라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포카라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Kathmandu)에서 200km 정도 떨어져 있는 네팔 제2의 도시이자, 관광지로서는 세계 3대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고 할 정도로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는 도시다. 약 해발 900m에 위치해 여름에도 날씨가 무덥지 않고, 페와 호수 인근으로 대부분의 여행자 시설과 식당들이 모여 있어 여행하기에 아주 좋은 편이다. 짧은 2주 비자를 받아왔던 터라 오랜 시간 머물지는 못했지만 이곳은 다시 올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카라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래킹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필요한 장비들을 빌리고 퍼밋을 받았다. 일행은 푼힐에 먼저 올라갔다가 베이스캠프로 올라가는 코스를 따라 올라가기로 했고 나는 푼힐에 가지 않고 바로 베이스캠프로 올라가기로 해 산 초입에서 헤어져 각자 길을 올랐다. 사실 그 일행과는 서로 여행 스타일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내심 불편하던 차였는데 혼자 산행을 하게 되어 마음이 홀가분했었다. 아름다운 히말라야의 풍경을 혼자서 오롯이 볼 생각을 하니 들떠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히말라야 또한 나의 생각과는 달랐다. 목가적인 전원 풍경에 감탄하던 것도 잠시 첫날 조금씩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자 술에 취한 남자가 나를 계속 따라오며 말을 걸었고, 그것이 귀찮기도 조금은 무섭기도 했던 나는 앞에서 걷던 중국인 아저씨들에게 무작정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 중국인들은 무척 친절했다. 마침 점심 때라 시울리 바자르에서 점심을 함께 먹었는데 사람이 뒷간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했던가, 막상 취객이 떨어지자 다시 혼자 산행을 해보고 싶던 나는 중국인 아저씨들에게 그러면 나는 먼저 올라갈 테니 여행 잘 하시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산행 둘째 날에는 초장부터 모자를 쓴 어떤 남자가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채 계속해서 나를 뒤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본격적인 산으로 들어가기 전 마을의 끝자락인지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그 남자와 떨어지려고 해봤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그 사람이 나를 따라오고 있는 것은 점점 더 확실해지기만 했다. 여기서 더 걸어가면 진짜 깊은 숲 속이기에 덜컥 겁이 났던 나는 산행을 잠시 멈추고 슈퍼 앞에 앉아 시간을 때우며 그 남자를 쫓아 보내기로 했다. 예상했던 대로 내가 계속해서 움직이지 않고 사람이 많은 곳에 앉아 있자 한참을 내가 보이는 골목길에 서서 방황하던 그는 30여분 만에 자리를 떴고 나는 그로부터 잠시 후 예정된 산행을 시작했다.
깊은 숲을 걷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소를 모는 아저씨가 내 앞을 걷고 있었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숲 속에 나 밖에 없었다. 나는 문득 아까 그 남자가 떠올라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경치가 잘 보이지 않고 얼른 사람이 많은 마을이 도착하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한두 시간 여를 어떻게 걸은지도 모르게 초조하게 걷다 보니 콤롱이라는 마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로지(Lodge)에서 어제 시울리 바자르에서 만난 그 중국인 아저씨들을 다시 만나 이후 산행이 끝날 때까지 동행을 하게 된다.
나는 영어가 짧았고 아저씨들은 OK? 말고는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 휴대폰에 내장된 사전에서 한국어와 중국어 단어를 찾아서 보여주면 한자를 보고 추측하는 방법으로 산에서 내려올 때까지 대화를 했다.
나는 포터도 없이 혼자 떠났는데 아저씨들에게는 갓 스무 살이었던 쉬버라는 네팔 청년 포터도 있었다. 쉬버가 영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저씨들의 포터인 쉬버와 산행 기간 동안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히말라야 자락에 살며 포터를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많은 포터들과 달리 쉬버는 방학 기간 동안 포터 아르바이트를 하러 포카라에 온 카트만두에 사는 대학생이었다.
독일어를 좋아해서 공부 중인데 언젠가 꼭 독일에 가고 싶다고 말했던 쉬버가 독일에 갔는지 안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훗날 한국에 돌아와 쉬버가 카트만두에 있는 독일문화원 괴테 인스티튜트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사실 당시 독어독문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하고 있었는데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독일어를 비롯해 공통의 관심사가 꽤 많이 있었기 때문에 대화가 잘 통했다.
혼자 떠난 여행이 사람으로 가득 찬 여행이 되어 가는 동안
나는 항상 나보다 인생 경험이 많고 여행 경험이 많은 그들에게
의지하고 기대기만 했던 것은 아닐까.
쉬버는 내가 무척 강한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아직까지는 그 수식어가 조금은 부끄러웠다. 아직까지 강하다는 말을 듣기에는 나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태국에서 인도로, 인도에서 네팔로, 히말라야로 오기까지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여러 역경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혼자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혼자 떠난 여행이 둘이 되고 셋이 되고 넷이 되어 사람으로 가득 찬 여행이 되어 가는 동안 나는 항상 나보다 인생 경험이 많고 여행 경험이 많은 그들에게 의지하고 기대기만 했던 것은 아닐까. 어느샌가 혼자보다 둘이 편하고 혼자가 어색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쉬버가 무슨 의미로 나를 강한 사람이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강한 사람은 무슨 일이든 혼자 척척 잘 해내고 설령 사람들과 같이 있어도 그 속에서 리더십을 발휘해 모두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의미했고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중국인 아저씨들은 나에게 굉장히 친절했고 아주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쉬버에게도 좋은 사람들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저씨들은 배고픔을 잘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래서 때때로 점심을 거르고 바로 그날의 목적지인 마을을 향해 가고자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포터인 쉬버는 달랐다. 도합 20kg에 달하는, 가냘픈 자신의 몸보다 더 큰 그들의 짐을 대신 메고 있었다. 쉬버에게는 점심시간이 필요했고 밥을 먹으며 쉴 시간이 필요했는데 나에게 친절했던 아저씨들은 자신들의 몸이 편하고 빨리 도착하고 싶다는 이유로 쉬버에게까지 그 친절함을 베풀어 주지는 않았다.
나는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시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아저씨들을 이끌기보다는 이제는 거의 쫓아가고 있는 쉬버가 안타까워서 내가 점심을 먹고 싶어서 그러니 쉬었다 가자고 산행이 끝나는 날까지 매 점심시간마다 아저씨들에게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아저씨들은 내가 밥을 참 잘 먹는다고 말했다. 내가 밥을 잘 먹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사실 배가 고파서 쉰 것이 아니라 그저 쉬버가 배를 채우고 조금이라도 쉴 수 있기를 바랐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알았던 것인지 쉬버는 매번 나에게 고맙다고 말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동생 같은 그 친구를 보며 더욱 마음이 짠했었다.
그래도 막상 산에서 내려오니 쉬버를 불러 따로 밥을 사주고 그동안의 고마움의 표시로 선물까지 사준 것은 그 아저씨들이었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밥 먹을 시간도 주지 않으면서 하산하고 나니 선물을 사주고 거한 식사를 사준다는 것이 말이다.
어쨌든 간에 아저씨들은 나에게 좋은 산행 동지들이었고, 나는 나보다 속도가 빠른 아저씨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따라가기 위해 늘 내 페이스보다 빠르게 산을 올랐다. 덕분에 하산하는 길에는 무릎이 고장 나서 최악의 컨디션으로 내려왔는데 그래서 막상 산을 내려올 때는 아저씨들의 포터였던 쉬버가 늘 느리게 내려오던 내 뒤에서 나보다 더 느리게 묵묵하게 걸어와 주었고 나는 그것이 무척 미안하고 고마웠다.
고대하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역시나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360도로 펼쳐진 설산의 감동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사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1박을 하고 싶었지만 전날 쉬버가 몸이 아픈 관계로 우리 모두는 바로 아랫마을인 MBC(마챠푸차레 베이스캠프)에서 묵기로 했다. ABC에서 묵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우리는 그렇게 서로 조금씩 뒤쳐질 때마다 양보하고 도와가며 일주일간의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포카라를 왜 블랙홀이라고 부르는지는 오랜 기간 머물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특히 인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던 나에게 포카라의 음식들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숙소에는 여행객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대부분은 후에 바라나시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산행을 시작하기 전 헤어진, 잘 맞지 않던 그 일행과는 중국인 아저씨들과의 산행 도중 우연히 다시 마주쳐서 함께 산을 내려왔고 어쩌다 보니 다시 아슬아슬한 동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모든 인간관계에서는 배울 점이 많았다.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함께 보내는 매 순간순간이 소중했고 만남과 헤어짐의 순간이 아쉬웠다. 한국에서였다면 언제든 다시 볼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토록 절실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인도에서는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사람이기에, 또한 돌아가서 만나게 되더라도 지금과 같을지 아닐지 알 수 없기에 더욱 그 순간들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꼭 잡고 있고 싶었다.
맞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는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아직까지 그 관계를 통제하고 가끔은 잘라낼 수도 있을 만큼의 용기를 가지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면이 있었지만 그러면 또 그러는 대로 그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내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여행과 산행은 마치 인생의 축소판 같았다. 당시 겨우 20대 중반이었던 나에게 인생을 논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어찌 됐든 내가 이십몇 년을 살아오며 느낀 것들은 모두 그 안에 있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었고,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었다. 산을 올라갈 때는 다른 사람이 아팠지만 내려올 때는 내가 아팠다. 남들이 즐거웠던 여행지라고 해서 나에게도 즐겁지는 않았고, 남들은 그냥 지나친 곳이 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장소로 남기도 했다. 태어나서 20대 중반이 될 때까지 인생을 느리게 걸어왔다면 여행을 온 뒤로는 지금껏 걸어온 인생을 롤러코스터를 타고 다시 한 바퀴 돌아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길 위에서 생각할 것, 돌아봐야 할 것,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따라잡기가 벅찰 때도 있었지만, 또한 이것이 바로 내가 여행을 좋아하고 산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여행은 삶 그 자체였다.